일제 강압에 날치기 통과… 결의 당일 20여명 참배 ‘최악의 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신사참배 결의 후 평양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신사참배는 한국교회가 일제 압력에 굴복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9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사진이 실렸다.




신사참배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은 공립학교에서 먼저 시작되어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거쳐 드디어 교회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역사적인 제27회 조선 장로교 총회가 평양 서문외예배당에서 개회되었다. 평양 서문외교회 본당에 전국 27개 노회(만주지역 4개 노회 포함)에서 온 목사 86명과 장로 85명, 그리고 선교사 22명 등 193명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대들이 모였다.

이 총회는 신사참배와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작 전부터 긴장감이 높았으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총대들 사이에선 “이번 총회를 넘기긴 어려울 것 같다” “신사참배 결의를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가득했으나, “드디어 결의하게 됐다”며 반색하는 이들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대구남산교회 목사였다. 첫날 저녁 8시에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뽑혔다. 총회 첫날이 지나고 드디어 운명의 날인 9월 10일이 됐다.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재개되었을 때,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명의 사복 경관으로 완전히 포위되었고 강단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부장을 위시해 고위 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총대들의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 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채정민 목사 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되었다.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가 평양·평서·안주노회 35명 노회원을 대표해 신사참배에 찬성한다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했다.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가 동의하고 안주노회장 길인섭 목사가 재청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홍택기 총회장이 “‘가’(可) 하면 ‘예’ 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10여명만 “예”라고 대답했다. 다수가 침묵하자 경찰이 일어나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홍 총회장은 통상 회의 규칙인 거부 의사를 물어보는 과정을 생략한 채, 의사봉을 두드리면서 결의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러자 “부(不)하면 아니오 하시오”라는 사회자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방위량(W. N. Blair)과 브루스 헌트(Bruce F. Hunt)를 비롯한 몇몇 선교사들이 일어나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를 외쳤지만, 일본 경찰에 의해 끌려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날치기로 신사참배 결의가 이뤄지자 전북 김제 출신의 서기 곽진근 목사가 미리 준비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追)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써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홍택기.”

이날 결의가 이뤄지자, 평양기독교 친목회 회원인 심익현 목사의 제안으로 그날 정오에 총대 대표들이 평양신사를 참배했다. 여기에는 임원 대표로 부총회장인 경남노회 소속 김길창 목사가, 회원 대표로는 23개 노회장이 참여했다. 이들의 신사참배는 한국교회가 드디어 일제 압력에 굴복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기에 9월 12일 자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 참배 사진이 실렸다.

이렇게 마지막 보루였을 뿐 아니라 최대 교세를 가지고 있던 장로교마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날은 한국교회사에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날이다.

한국교회사에서 교단 분열이나 부정부패, 이단의 발흥과 같은 다른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각 개인의 문제이거나 교리상 문제, 또는 집단 간 이해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총회가 공식적으로 배도를 결정한 것으로 다른 문제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더구나 이것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거기에 절하지도 말라는 제1계명과 2계명을 모두 어긴 것이었다. 그것도 교단이 앞장서서 공식적으로 이를 결정하고 성도에게 강요한 것이다. 게다가 교단이 앞장서서 반대자들을 제명하거나 면직 처분을 내리고 일본 경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이 결정은 이후 여러 배도 행위들을 정당화했고, 더 큰 범죄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 결정을 계기로 더 큰 배도 요구를 교회에 서슴없이 강요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애국 행위라는 결정을 수용한 이상, 일제가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교단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저지른 이날의 결정은 전 한국교회를 크나큰 죄악의 길로 이끌고 말았다.

오창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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