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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주 칼럼] 넷플릭스가 한국의 ‘깐부’ 되려면



창업 초기 젊음과 트렌드 상징
미국 대중문화 흐름 바꾸고 일상 변화시키며 혁신 이끌어
공룡기업 돼 글로벌 책무 회피
오징어 게임 히트, 1조원 수익 계약대로라며 독식은 씁쓸
국내 인터넷망 무임승차 안 돼
망사업자 콘텐츠 품질 책임질 파트너… 상생·협력해야

그 시절, 미국 대학 동아리방이나 회의실에는 영화 DVD가 담긴 빨간색 부직포 봉투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친구가 빌린 DVD를 돌려봐도 되고 아무나 가까운 우편함에 넣으면 반납되는 시스템이다. 편리한데다 연체료도 없어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층에 특히 인기가 많았다. 이 봉투에 적힌 ‘넷플릭스(NETFLIX)’라는 단어는 젊음과 트렌드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20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갔던 시절 이야기다. 시간이 훌쩍 흐른 2021년, 넷플릭스는 미국 대중문화 흐름과 시청 습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케이블 TV를 끊고 넷플릭스로 옮겨가고 있다. 더 이상 방송사 편성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보고 싶은 콘텐츠를 원하는 시간에 몰아서 본다. 우리 삶을 바꾼 엄청난 변화다. 혁신이다.

시작은 단순했다. 비디오테이프를 깜빡하고 반납하지 않아 연체료 40달러를 내게 된 리드 헤이스팅스가 1997년 홧김에 직접 대여업체를 차렸다. 온라인을 통해 비디오와 DVD 대여업을 하다가 2007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사업을 확장했다. 2013년 자체 제작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대성공을 계기로 자체 콘텐츠 제작에 공을 들였다. 제작비를 넉넉하게 지원하면서도 창작자를 간섭하지 않았다. 실력은 있으나 돈 없고 간섭은 싫은 창작자들이 모여들었다. 질 높은 콘텐츠가 쌓이면서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넷플릭스는 9일 현재 시가총액 2885억 달러(약 339조원), 전 세계 가입자 2억명이 넘는 업계 글로벌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에 본격 알려진 것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가 개봉한 2017년이다. 유명 감독의 기대작이 넷플릭스로 개봉된다고 하자, 극장가는 영화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넷플릭스 영화를 칸국제영화제는 시상식 후보에서 제외했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아카데미 후보가 되면 안 된다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넷플릭스 영화 ‘로마’가 오스카 감독상을 받고 스필버그가 넷플릭스 전용 영화를 만드는 세상이 됐다. 넷플릭스의 세계 정복은 이제 눈앞에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덩치가 커진 만큼 마땅히 져야 할 책무에는 눈과 귀를 닫았으니 실망스럽다. 조직이 비대해지고 사업이 확장되면서 혁신 기업의 초기 정신은 변질했다.

한국 제작 콘텐츠 ‘오징어 게임’은 그 많은 넷플릭스 작품 중에서 최고 히트작이 됐다.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으로만 벌어들인 수익은 약 1조원. 제작비는 약 200억원이 들었으니 가성비가 끝내준다. 계약상 넷플릭스가 저작권을 갖게 되지만 이렇게까지 대박 난 드라마 수익을 혼자만 챙기는 건 씁쓸하다. 창작자와의 상생을 강조하더니 말이다. 비난 여론이 일자 인센티브 지급을 언급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국내 인터넷망 ‘무임승차’ 논란은 핫이슈다. 넷플릭스 히트작이 많아지면서 콘텐츠를 실어 나르는 인터넷망에 트래픽이 심해졌다. 오징어 게임이 나온 지난 9월에만 트래픽이 약 24배 늘었다. 2차선 도로로 충분했다면 이젠 8차선을 깔아야 한다. 이 비용은 SK브로드밴드 같은 인터넷망 사업자가 부담한다. 대신 네이버 카카오 등 한국 콘텐츠 업체는 연간 많게는 수백억원의 망 사용료를 지급한다. 넷플릭스의 경쟁업체인 해외 기업 디즈니, 애플TV도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사용료를 내고 있다. 그런데도 글로벌 1위 기업 넷플릭스는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미국과 프랑스에선 낸다는데 한국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아닌가. 사용료를 내라는 국내 재판 결과에도 그저 버티는 중이다. 지급해야 할 돈은 업계 추산 700억~1000억원이다. 연체료 40달러에 분노해 창업한 회사가 이제는 공룡기업이 되어 막대한 금전적 부담을 회피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문제를 지적하고, 국회가 관련 법제화를 추진하자 넷플릭스 수석 부사장이 지난주 급히 한국을 찾았다. 그는 넷플릭스가 한국의 ‘깐부’라면서도 돈은 못 낸다고 했다. 깐부의 뜻을 모르는 것 같다. 콘텐츠 창작자뿐 아니라 망사업자 역시 넷플릭스의 품질을 책임지는 파트너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관계는 깐부가 아니다. 넷플릭스가 한국의 친구가 되기 위해선 마음을 얻어야 한다. 마침 최대 라이벌 디즈니플러스가 12일 한국에 상륙한다.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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