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미분류  >  미분류

[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나혜석이 질투했던 파리 유학파… 비운의 화가가 남긴 걸작

파리 유학파 백남순이 해방 이전에 그린 그림으로 유일하게 남은 작품 ‘낙원’(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173×372㎝).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남편 임용련을 따라 정주에서 살 때 그렸다. 탁월한 기량의 엄청난 대작이기도 하지만, 8폭 병풍 형식의 캔버스에 그렸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다. 서양화를 공부한 1세대 화가로서 소재나 기법 면에서 동서양의 전통을 어떻게 융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남순아, 우린 조선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인물들이야. 나랑 같이 파리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자.”

192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은 외교관인 남편 김우영과 구미 여행길에 올라 프랑스 파리에 체류 중이었다. 그때 현지 유학 중인 후배 백남순(1904∼1994)을 만났다. 서울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백남순도 나혜석이 나온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적이 있지만 졸업은 하지 못하고 조기 귀국했다. 서울의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백남순은 화가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에 도전해 거듭 입선하며 2호 여성 서양화가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꿈이 컸던 그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파리 유학을 감행한 것이다. 한창 사설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던 그는 나혜석을 만날 즈음에 고국의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갈등하고 있었다. 그런 백남순에게 나혜석은 파리에서 함께 공부하자며 조언을 한 것이다. 파리에 여행 온 나혜석은 유학생 백남순이 부러웠고 자신도 현지에 계속 남아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에게 1년 만이라도 더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백남순까지 거들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귀국길에 올라야 했던 나혜석은 파리에 남는 백남순에게 180도 태도를 바꿔 이런 말을 던졌다.

“여자가 그림은 그려서 무엇에 쓰게. 너도 시집이나 가라, 얘.”

나혜석도 질투한 파리 유학파 백남순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나혜석의 ‘저주’대로 현지에서 만난 조선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상대는 당대 최고 엘리트 임용련(1901∼1959)이었다. 임용련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일경의 수배를 받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임파(Phah Yim)란 이름의 중국 여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 미대를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해 유럽미술연구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온 그는 백남순에게 반했다. 둘은 현지에서 식을 올리고 파리 근교 에르블레에 신혼집을 차렸다.

1930년 귀국한 둘은 동아일보 사옥에서 부부전을 열며 화려한 신고식을 했다. 하지만 구미 유학파를 받아줄 번듯한 무대는 서울에 없었다. 남편 임용련이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오산중학교에 미술 및 영어교사로 부임하자 백남순도 따라갔다. 전업주부로 지내면서도 백남순은 화가로서 꿈을 이어갔다.

격동의 현대사는 임용련·백남순 부부에게 특히 혹독했다. 부부는 광복 후 북한 공산주의 정권을 피해 월남했는데 그때 챙겨오지 못한 그림들은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전소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세관 관장으로 있던 임용련은 전쟁 중 인민군에 끌려가 처형됐다. 7남매를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한 백남순은 붓을 꺾고 전쟁고아를 돌보는 사회사업가로 변신했다.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한국 미술계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백남순을 다시 불러낸 건 한국 최초의 미술전문기자로 통하던 이구열씨다. 그는 1981년 미술전문지 ‘계간 미술’ 여름호에 미국에 있던 백남순 인터뷰가 실리도록 주선했다. ‘반세기 만에 뉴욕화실을 공개한 첫 부부 화가 백남순 여사’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77세였다.

이 기사가 나간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남순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교편을 잡았던 보통학교의 동료 교사이자 절친이었던 민영순씨가 우연히 이 기사를 봤다. 그녀는 백남순이 결혼 선물로 그려준 유화가 있다고 했다. 몇 차례 이사를 가면서도 잘 챙긴 덕분에 백남순이 광복 전에 그린 그림 중 유일하게 하나가 보존됐다.

화가 백남순의 작품세계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이 작품은 정주에 살던 시절 셋째를 낳은 이듬해인 1936년에 그린 700호 대작이다. 이 작품이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갔고 유족의 기증으로 국민 품에 안겼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전시장의 도입부를 큼지막하게 장식하고 있다.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과 동양의 무릉도원 혹은 무이구곡도의 전통을 결합한 것처럼, 동서양의 도상이 혼합된 독특한 느낌의 풍경화다. 캔버스 천을 바탕으로 하되, 전통의 8폭 병풍 형식으로 장정한 것도 이색적이다. 표현 기법에서도 동서양을 융합했다. 전통 산수화에서 차용한 폭포와 깎아지른 산, 넘실대는 강 등이 화면 저 멀리까지 아득히 펼쳐진 가운데 서양의 집과 반라의 남녀가 다양한 자세로 배치돼 있다. 백남순이 일제강점기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 미술평론가 안석주가 “상상도 못 할 남성적인 그림”이라고 평가했던 그대로다. 그 호방함의 이면에는 여러 자녀를 둔 32세 주부가 화가로서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안간힘이 녹아있다.

민씨는 수개월 뒤 또 다른 그림 하나를 찾아냈다. 임용련이 신혼을 보낸 파리 근교 에르블레 풍경을 그린 유화다. 이 그림은 민씨가 진작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비운의 현대사에서 건져낸 유학파 부부 화가의 역작이 기증 덕분에 모두 국민의 품에 안겼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