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사면초가 고난’ 속에도 의료선교의 꽃을 피우다

인천 율목동 인천기독병원 장례식장 뒤편. 붉은 벽돌 건물 가운데 부분이 1930년대 초 미국 감리회 성도들의 선교 헌금으로 건축된 병원 일부다. 아래 사진의 맨 우측.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파괴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은 부분이기도 하다. 이후 좌우로 증축했으며 관사·행정실 등으로 사용됐다. 원목 강경신 목사는 “복원을 서둘러 역사 유적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쟁 참화를 딛고 재건된 병원. 1956년 사진.
 
로제타 홀 (한국명 허을·1865~1951)
 
병원 내에 있던 인천기독간호대 후신 안산대학.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홀가 무덤.
 
동대문부인병원과 동대문교회. 1890년대 추정.
 
병원 옆 로제타홀기념사업회와 기념관 건물.
 
노년의 로제타 홀과 아들 셔우드 부부.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코로나19로 방역 4단계가 적용되고 있었다.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에 다다를 즈음 ‘인천기독병원에 가실 분은 1번 출구를 이용하라’는 광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가난해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던 민중을 구하던 한국의 기독병원은 구제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전국의 기독병원은 경영난에 직면해 있다. 의료선교의 본령을 지키면서 국민의 의료서비스 욕구를 맞추자니 운영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성자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 같은 이들이 기독병원에 근무하면서 진료비가 없어 쩔쩔매는 환자가 몰래 도망을 가도 모른 척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천기독병원은 1921년 이래 율목동 언덕배기 그 자리 그대로다. 미국 크리스천의 선교 헌금으로 지은 벽돌 병원건물을 증축, 리모델링해 사용하는 정도다. 하지만 지금도 이 병원은 설립자 로제타 홀(한국명 허을) 선교사가 추구했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교병원’의 취지를 살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 병원은 운영에 애를 먹고 있다. 지하철 1호선 인천기독병원 ‘광고 안내방송’은 그래서 더욱 짠했다.

로제타 홀.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려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이 여성 의료선교사는 “사해(四海)의 가난한 민중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의료선교”라는 미 감리회 목사의 설교를 듣고 바로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펜실베이니아여자의대에 진학, 헌신의 길로 나가게 됐다. 그는 졸업 후 감리회 ‘여성 자선의 집’에 지원,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한다. 여기서 반려자 윌리엄 제임스 홀(하락·1860~1894)을 만났고 1889년 약혼한다. 제임스는 부흥사 무디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았고 역시 로제타처럼 교직에서 일하다 선교 목적으로 의대에 진학했었다. 두 사람은 1892년 6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서양인끼리 한국에서 최초의 결혼예배였다.

‘(조선의) 짐꾼들은 이런 장소를 지날 때마다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닥터 홀(제임스)은… 그러한 귀신들을 섬겨봤자 아무런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설득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평양의 시료소에서 닥터 홀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더 잘 알게 된다.’(노블 선교사의 제임스에 대한 기록)

‘나는 지금 동대문에서 방금 돌아왔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그곳에서 의료 봉사를 하기로 했다. …장소가 매우 적합하므로 시료소는 틀림없이 커질 것이다.’(로제타 홀 일기 중)

신혼의 선교사 부부는 각기 평양과 서울 사역지에서 지냈다. 평양 가려면 이래저래 3일이 소요되는 조선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평양에서 발진티푸스 조선인, 청일전쟁 부상 군인을 치료하던 닥터 홀은 발진티푸스로 순교했다. 그는 짧은 기간 남산현교회, 기독병원, 광성학교를 설립했다. 로제타의 복중에 둘째 에디스가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섭리로 그들을 이끌어 갔다. 로제타는 남편의 순교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조선의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아 조선은 자래 남녀의 분별이 심하야…종족 간이라도…상면을 불허하는 습관이 유하야 불행질병에 고통할지라도 비상한 위증이 아니면 남자 의사의 진찰을 불긍하는 터이라…경성 동대문 내 홀병원장 홀 부인은 인천에 부인병자 구원기관이 읍슴을 개탄하야…인천부 율목리에…부인의원을 설립하고…부인사회에 다대한 편의를 보급하던 김영흥 여의사를 청빙하야 목하 개업 중인바…’(1921년 10월 30일 동아일보)

로제타의 나이 56세 때 일이고, 그의 한국선교 29년째였다. 그간 로제타는 남편과 딸을 잃었고, 자식과도 같았던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부부도 잃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경술국치도 겪었다. 그리고 조선의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3·1만세운동이 일제에 무참히 제압되는 걸 ‘동요 없는 눈빛’을 하고 담아야 했다. 조선 거리 어디에도 전염병 환자가 넘쳐났다. 일제는 그들을 잡아다 강제 수용했다. ‘환자의 권리’와 같은 인권이 있을 리 없었다. 여자들의 삶은 더없이 비참해 태어난 것 자체가 죄였던 조선이었다. 병들면 버려지기 일쑤였다.

로제타가 인천에 부인병원을 설립할 당시 그는 스크랜턴 대부인이 그녀에게 동대문부인병원을 맡겼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 한국인 제자들을 세웠다. 인천 부인병원은 1898년 남편의 유업을 받들어 평양에 광혜여원을 설립한 데 이은 세 번째 여성 병원이었다. 평양 선교를 하던 과정에서 유복자 에디스가 풍토병으로 죽자 ‘에디스 마거릿 어린이병동’을 광혜여원 내 운영했다.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아마도 닥터 홀이 건재했더라면 인천 부인병원은 동대문부인병원에 이은 두 번째 병원이었을 것이다. 산발한 조선의 여성들이 핍박받아 병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가는 걸 제물포 입국 때부터 봐 왔기 때문이다. 로제타 홀의 의료사역에서 시작된 현 이대병원·고대병원 등의 크리스천 의료 관계자들이 ‘로제타홀기념사업회’와 기념관을 인천기독병원 옆에 둔 것도 이런 빚진 마음에서인 듯하다.

1934년 미 감리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행사가 인천에서 열렸다. 내리교회 소년척후대가 노방전도를 하며 전도지를 뿌렸다. 이날 인천 부인병원 코스트럽 선교사는 ‘1년 동안 치료 환자가 1만3490명이며 유아부 수가 280명’이라고 보고했다. 주기적으로 인천 부인병원을 오가던 한국 근대의학의 개척자 로제타는 의사가 된 조선 태생 아들 셔우드 홀을 통해 조선 의료선교를 계속했다.

인천=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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