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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장욱진이 남 줬다고 ‘버럭’… 그 그림 돌고 돌아 국민 품으로

장욱진은 청년 시절 이후 평생 공책 크기 작은 그림만 그렸다. 사진은 고향에 피란가 있을 때 배를 타고 장에 가는 사람들을 그린 ‘나룻배’(1951,14×2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일본 유학 시절 작품 ‘소녀’(193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고교시절 그림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공기놀이’(1938, 65.5×80.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완숙기 기량을 보여주는 ‘부엌과 방’(1973, 22×27.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6·25전쟁 직후의 일이다. 장욱진(1917∼1990)이 아내에게 크게 화를 냈다. 아내는 예술가 남편을 둔 탓에 피란지 부산에서 국수 장사를 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살길이 막막해지자 장롱에서 혼수를 꺼내 팔고 곡식도 팔아 변통했다.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참기름을 보내오면 동창들에게 팔았는데, 숫기 없는 그녀를 대신해 친구들을 불러 모아 참기름을 팔아주던 동창이 있었다. 아내는 그 마음이 고마워 남편의 그림 하나를 덜컥 선물로 줬다.

그 그림은 ‘소녀’(1939)였다. 장욱진이 일본 데코쿠미술학교 유학 시절 그린 것 중 유일하게 남은 작품이었다. 뒷면에도 귀한 그림이 있었다. 전쟁 중 고향인 충남 연기군 연동면 내판리에 잠시 피신해 있을 때 장날 강을 건너 장 보러 가던 마을 사람들(‘나룻배’·1951)을 뒷면에 그려 넣었다. 물자가 귀한 시절이었다.

말수가 적고 순한 장욱진이 화를 내게 만든 작품 ‘소녀/나룻배’가 돌고 돌아 국민 품에 안겼다. 장욱진의 맏딸 장경수 경운박물관장은 최근 국민일보와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무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림을 되살 처지가 안 됐어요. 그래서 소장자에게 나중에 그림을 처분할 사정이 생기면 꼭 삼성가에 넘겨달라고 부탁했지요. 삼성가라면 제대로 오래 간직할 것 같았거든요.”

장 관장은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아내 홍라희씨와 같은 경기여고 출신이다. 그런 인연이 전부는 아닐 테지만 이건희 컬렉션에는 장욱진 작품이 대거 포함돼 있다. 그중 화가가 고교 시절에 그린 ‘공기놀이’(1938)부터 70~80년대 완숙기 작품까지 60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장욱진은 일본 유학파 2세대다. 김환기(1913~1974) 이중섭(1916~1956) 유영국(1916~2002) 등 당시 일본에서 공부한 또래들은 서구의 아카데미풍이나 인상주의, 나아가 추상과 야수파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세례를 받은 작품을 했다. 장욱진은 달랐다. 마치 어린아이의 작품을 보는 듯 어떤 계보도 없는 독창적 세계를 걸어왔다.

고향 선산의 산지기 딸을 모델로 했다는 ‘소녀’는 머리가 가분수처럼 크고 형태가 아주 단순화돼 일부러 못 그린 듯 소박한 맛이 풍긴다. 이 작품은 세로 30㎝ 3호 크기로 작다. 그는 평생 작은 그림을 그렸다. 일제강점기 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공기놀이’가 가로 80㎝ 남짓 25호 크기로 그나마 큰 축에 들 정도다.

왜 작은 그림을 그렸을까. 기질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역시 작은 그림을 주로 그린 박수근도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해방 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등 출세의 등용문으로 통하던 공모전에 도전할 때는 50호 100호 대작을 그렸다. 장욱진은 대작을 내야 하는 공모전을 기피할 정도로 큰 그림이 성정에 맞지 않았다. 세속의 유명세를 얻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팔을 뻗어 그리는 건 불편하고 친밀감이 없다고 하셨어요. 손안에서 갖고 놀기 좋을 정도의 작은 크기를 선호하셨죠.”

서양화가들처럼 이젤에 캔버스를 세워둔 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리는 건 맞지 않았다. 평생 동양화처럼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 그 작은 그림에 조형적 요소들이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밀도감 높게 그려져 조형성을 뽐낸다. 장욱진의 그림 속엔 나무 집 사람 해 달 까치 소 돼지 닭 등 몇 가지 모티브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해와 달이 동시에 나오는 작품도 있다. 전통의 문인산수화, 민화 등에서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해 보이는 이런 모티브로 과거를 현대로 잇는다.

미술평론가 김이순은 “최소한의 모티브만으로 작가의 이상세계이자 소우주를 표현한 것”이라 했다. 정영목 서울대 명예교수는 “시간을 역행하는, 시간을 정지시켜버리는, 또는 시간을 초월한 일상의 공간을 표현했다”고 평했다.

장욱진의 장인은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다. 해방 후 장인의 소개로 국립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전신) 진열과에서 일했지만 2년여 만에 그만뒀다. “늘 담배 파이프만 물고 가만히 있다”는 관장의 불평을 전해 듣고는 대책도 없이 때려치운 것이다. 54년부터 서울대 미대 교수로 강단에 섰지만 5년여 만에 물러났다. 이때 외에는 월급봉투를 가져온 적이 없는 가장을 대신해 아내가 대학로에서 서점 ‘동양서림’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돈에는 무신경한 가장이었지만 그림 속에는 늘 집과 가족이 나온다. 이중섭이 일본으로 떠나보낸 가족을 사무치게 그리워해 탯줄처럼 얽힌 가족을 표현한 것과 달리 장욱진의 그림 속 가족은 각자의 방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 속에서 가장은 여름철 나무 그늘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거나 모기장 안에 큰대(大)자로 누워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자식들이 모두 “내가 가장 많이 사랑받았다”고 기억하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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