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영성 작가] 죽음보다 더 큰 고통 ‘절망’, 치유의 길은 희망 아닌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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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아래 사진)에 따르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인간뿐이다. 실존적 자각을 할 수 있는 인간만이 절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상의 그 어떤 육체적 질병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죽음은 질병의 최후이긴 하지만, 죽음 자체는 종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망의 고통이란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절망하는 사람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와 비슷하다. 그는 누워서 죽음과 싸우고 있지만 죽을 수조차 없다.”(‘죽음에 이르는 병’ 중)

그에 의하면 절망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으며, 다른 말로는 죄의 상태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절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뚜렷이 이해하려는 노력의 고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축복이다. 오직 기독교인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기독교인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병은 ‘절망’이다.
 
‘절망’의 해독제는 ‘믿음’

키르케고르는 평생 “어떻게 인간은 주체적으로 되는가”란 질문을 “어떻게 인간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란 질문으로 구체화해 왔다. 그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작품은 그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죽음에 이르는 병’일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에 따라 절망의 정도를 세 단계로 나눈다. 가장 위험한 단계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절망은 자신이 절망에 빠졌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시작된다. 이보다 나은 단계의 절망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자포자기) 절망’이다. 또 가장 나은 단계의 절망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이다.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자기 상실, 즉 자기를 있게 한 신과의 관계를 상실했을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하지만 그 때문에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든 절망을 짊어지고 신 앞에 홀로 서는 것만이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로 존재하는 용기

그리스도인은 나름의 여러 가지 형태의 절망을 경험한다. 그는 절망에 빠진 상황은 ‘죄’라고 부르게 되는 상태이며 절망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되라는 참된 부름에 소외된 상태라고 말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절망해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형태’와 ‘절망해 자신이려고 하는 형태’이다.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자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반항으로 나타나는 절망은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도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형태이다.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자기가 되려 하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소명을 주신 존재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는 ‘믿음은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라고 말한다. 해독제는 자신이 독에 물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내 삶을 절망에서 끌어낼 ‘믿음’은 어디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그 답을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힘이 없으므로 진리뿐 아니라 진리를 이해할 조건까지 제공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이 존재는 구원자이자 구속자라고 불리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진리를 배우는 이 과정을 일컫는 이름이 ‘회심’일 거라 말하고 거기에는 ‘회개’가 따라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키르케고르는 절망이란 질병에 대한 해독제로 자기주장이 아닌 순종, 지배가 아닌 겸손, 죄악 된 반항이 아닌 믿음을 제안한다. 이것들이 진정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수단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론이 아닌 삶 자체가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을 주장한다 해도,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런 마음은 그의 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독교의 의미를 해설할 수 있고 많은 개별적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나 자신과 내 삶에 깊은 의미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진리가 내 앞에 서 있다 해도 차갑고 무력하여 내가 그것을 인정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믿음의 헌신이 아니라 불안한 떨림만 끌어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안에서 생명력을 얻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요점이라고 본다. 내 영혼은 바로 이것을 갈망한다. 아프리카의 사막이 물을 갈망하는 것처럼.”(1835년 6월 1일 일기 중)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양말을 신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고, 그저 군중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키르케고르의 부친 미하엘은 코펜하겐에서 성공한 부유한 상인이었다. 키르케고르는 목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코펜하겐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미학적 천재성을 가졌던 그는 문학과 철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꾸준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43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필두로 10여년에 걸쳐 수십 편에 달하는 작품을 쏟아냈다. ‘반복’ ‘두려움과 떨림’ ‘불안의 개념’ ‘철학적 조각들’ ‘사랑의 역사’ ‘그리스도교적 강화집’ ‘죽음에 이르는 병’ 등 이 시기에 나온 대작들이다. 만년에 그는 국교화된 덴마크의 기성교회를 비판하며 정신적인 투쟁을 이어갔다.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어떻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자기’(self)가 되는 과업을 이룬 사람이 아닐까. 성령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본받고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자기란 과업을 이루는 것이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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