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믿음 안에서 둘이 하나로 ‘구국의 가시밭길’ 동행

지난 주말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 김구·최준례 부부 합장 묘역. 세찬 비에 봉분이 유실될까 봐 비닐로 덮어 놓았다. 최준례는 김구의 상하이 망명 정부 당시 그곳에서 산후 영양실조 등으로 숨졌다. 최준례 유해는 상하이에서 옮겨와 경기도 남양주 가족묘에 있던 것을 1999년 이곳에 합장했다. 멀리 아파트 뒤가 일제 주둔지·미군 용산기지 땅이다.



 
정부 주관 추모식 한 장면.
 
1924년 상하이 최준례 무덤. 뒤가 김구와 모 곽낙원. 두 아들 신(왼쪽)과 인. 비문은 조선어학자 김두봉이 썼다. 동아일보 보도 사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맞은편 상동교회 옛 모습과 현재. 제중원(중구 을지로 2가), 경신여학교(종로구 연지동)와 함께 부부의 활동 터이다.
 
1948년 김구 아들 김신이 어머니와 할머니 곽낙원 여사의 유해를 안고 인천항에 내리고 있다. 곽낙원은 “며느리와 나의 해골이라도 조국 땅에 묻어달라”고 했다.


‘그때 황해도 신천 사평동 예수교회의 영수 양성칙이 그 교회 여학생 최준례와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최준례는 그 동네에 거주하는 의사 신창희의 처제였다. 준례의 모친 김 부인은 경성에서 나서 자랐는데 과부가 되어 두 딸을 기르며 예수교를 믿고 있었다. 제중원이 임시로 구릿재에 세워졌을 때 원내에 살면서 제중원에 고용되어 있을 당시 신창희를 맏사위로 맞았다. 준례는 여덟 살 때 모친과 같이 신창희를 따라와 살고 있었다.’(‘백범일지’ 중)

백범 김구가 노총각 신세를 면한 이야기를 쓴 대목이다. 앞서 김구는 서너 번의 혼사가 이런저런 이유로 성사되지 못했다.

김구는 일본 밀정을 처단한 ‘치하포 사건’(1896)으로 제물포에서 감옥생활을 하다 탈옥, 한때 공주 마곡사 승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환속해 1902년쯤 황해도 장련에 사는 여옥이라는 여인과 약혼까지 했으나 여옥이 만성 감기로 죽고 말았다. 김구가 직접 염습해 안장해 주었다. 또 여옥의 어머니를 교회에 인도했다. 김구는 이 무렵 우종서 전도조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기독교교육사업을 벌여 나갔다. 훗날 우종서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 사역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구는 최준례를 만나기에 앞서 평양 방기창(1851~1911·조선 최초 7인 목사 중 한 사람) 목사 집에서 유숙할 때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 언약 단계까지 갔다. 안신호는 독립운동가 안창호(1878~1938)의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안신호의 변심으로 이 역시 깨지고 말았다. ‘백범일지’에 그와의 파혼을 못내 아쉬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1948년 김구가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을 때 안신호가 진남포 기독교여맹위원장 자격으로 김구를 안내한다.

최준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제중원 자체가 선교병원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제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예수를 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명 세례를 받고 자란 기도하는 자매였다. 그런데 최준례의 어머니가 기독청년 강모라는 이를 사윗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최준례는 자유결혼을 원했다. 그리고 김구에게 첫눈에 반했다. 뒤늦게 예수를 접한 김구가 열정적으로 기독교교육에 앞장서고 기독교감리회 엡윗청년회(조선 최초 청년단체) 활동도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씨 측에서 황해도 재령에 선교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미북장로회 소속 한위렴(헌트)·군예빈(쿤스) 선교사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선교사들이 김구와 최준례에 대해 교회법으로 책벌에 나섰다. 김구가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의 잘못이고 사회 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 군예빈은 이를 인정하고 혼례서를 작성해 주고 책벌을 해제했다. 김구는 어린 신부를 경성 경신학교(정신여고 전신)에 진학시켰다.

지난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 김구묘역. 소박한 봉분 한 기(基)가 공원 입구 우측 임정요인묘역을 향해 있다. 그 중간에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가 자리한다. 김구와 노선이 달랐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9년 제2회 아시아축구대회를 유치하고 효창운동장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김구 묘역을 이전하려 했던 곳이다.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 등이 막아 보존될 수 있었다.

1999년 4월 김구 봉분에 최준례의 유해가 합장됐다. 백범 서거 50돌을 앞두고 당시 둘째 아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 등 유족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의 뜻에 따라 남양주 가족묘지에 있던 최준례 유해를 이장한 것이다. 최준례는 1924년 백범의 망명지 상하이에서 망명 정부 일을 돕고, 신앙 안에서 가족을 이끌다 산후 쇠약 등이 겹쳐 숨졌다. 김신이 막 태어났을 때다.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폐 질환 등이 겹쳐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신한민보 보도. ‘…(최준례 여사의 장례는) 기독교식에 의지하여 목사 도상섭씨의 사회로 상해에 있는 남녀 동포가 엄숙하게 거행되었는데…(여사는) 김구씨가 (두 번째 감옥살이로) 가출옥이 되기 전 4년 동안에는 안악군에 있는 안신여학교에서 선생이 되어…늙은 부모를 봉양하면서…(남편의 망명으로 살림이 궁해) 여가 때는 동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어린 딸 하나와 삼대가 힘겨운 세월을 보내었으며….’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믿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성경과 미션스쿨 안신학교와 교회가 버팀목이었다. 백범은 1910년대 서명의숙 설립 등 교육사업, 전덕기 목사 등과 신민회 운동 등을 하다 1919년 망명한다. 이 고난의 기간, 부부는 세 딸을 낳았으나 연달아 병사 등으로 잃었다. 1945년 3월 큰아들 인(仁)마저 사망하는 가족사였다.

부부가 주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가장 행복했던 때는 결혼 직후였다. 당시 김구는 진남포 엡윗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상동교회(남대문시장 내)에서 열리는 청년회 전국대회에 참석했다. 부부는 상동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연지동 경신학교 등에서 데이트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준례가 신혼집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왔다. 이후 김구는 ‘예수교 주최로 평양에서 선생 공부(사경회)를 하며 전도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가 1910년 기독교지도자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를 탄압하면서 김구가 체포됐고 가정도 무너졌다.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그 열혈 장부 김구도 아내만은 무서워했다.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아내가 내 의견을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운다. 네가 감옥에 있는 동안 네 처의 절행에 모두가 감동했다 하신다…내외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지기만 하였다.’

천국의 가정을 꾸리고자 했던 기독청년 부부의 삶은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의 권력자들과 일제의 강압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며느리를 먼저 보낸 김구 모친 곽낙원 여사가 망명지에서 사망 직전 이런 말을 남긴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여 성공 귀국할 시는 나의 해골과 인이 모(최준례)의 해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매장하라.”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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