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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인간도 결국 거품처럼 소멸… 일상 속 공포

김언 시집 ‘거인’ 개정판이 나왔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이 거듭 출간되며 읽히는 이유중 하나로 수록된 시 ‘거품인간’에 주목한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꺼지고 말 거품에 안겨 있는 존재라는 환기시킨다. 게티이미지




서효인 시인에 따르면 내게는 다소간의 건강염려증이 있다. 누군가 농담 삼아 지어낸 것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건강염려증은 엄연히 사전에 등재된 표현이다. 건강염려증이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양상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사소한 신체적 증세 또는 감각을 심각하게 해석해 스스로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고 확신하거나 두려워하고, 여기에 몰두해 있는 상태.”

내 생각에도 건강에 대한 내 염려는 좀 지나친 데가 있다. 야근하던 어느 밤이었다. 몸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한쪽 팔에 불그스름한 반점이 듬성듬성 생겨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그 길로 회사를 나와 택시를 타고 근처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갔다. 택시 안에서 증상이 한층 심해진다고 느꼈다. 의심 가는 병명을 검색하며 나는 내가 대상포진에 걸렸음을 확신했다. 공포는 더 심해졌고 급기야 병원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도착해서 접수하고 증상을 말한 뒤 지정된 침대에 누웠다. 곁으로 다가온 의사가 이리저리 살펴본 뒤 천천히 말했다.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아니, 선생님, 아무래도 저 대상포진인 것 같은데요!” “대상포진 증상은 이렇게 나타나지 않아요. 쉬고 나면 좋아질 거예요.”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증상이 사라졌다. 이런 일이 내 일상에는 자주 일어난다.

세상에는 많은 공포가 있겠지만 몸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 발생하는 공포는 내게 있어 실존하는 최대치의 공포다. “무시무시한 불행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어.” 몸에서 벌어지는 일은 느낄 수 있을 뿐, 알 수는 없다. 감각할 수 있지만 지각할 수 없다. 과잉된 공포에서 출발한 내 왜곡된 인식은 공포의 일상화를 조장한다.

‘피버드림’은 공포소설이다. 내게는 그렇다. 이때의 공포는 윤곽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공포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의 한가운데에서 전개되는 기승전결이 날카롭게 심장을 조인다. 공포의 전제는 ‘알 수 없음’이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불행의 행로가 어떻게 진행될지, 피해는 얼마나 심각할지, 형상을 가늠할 수 없을 때 공포는 증폭되고 급기야 우리를 제압한다.

소설은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된다. 시골 병원의 침대에 누워 죽어 가는 아만다와 6년 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가다 마을의 한 여인에게 치료를 받은 뒤 괴물이 됐다는 소년 다비드. 다비드에 대한 이야기에 잔뜩 겁을 먹은 아만다는 딸과 “구조거리”를 유지하며 노력하지만 자신 역시 무언가에 중독돼 죽어 간다.

“정확히 언제 나빠지기 시작하나요.” 언제부터 안 좋아질지 아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그때까진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점은 중요한 정보다. 언제부터 안 좋아질지 알 수 없어서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마니까. 환경오염으로 인해 발생하는 중독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나빠질지 알 수 없지만 나빠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파괴한다. 염려증은 윤곽을 헤아릴 수 공포 앞에서 고개 드는 마음의 질병이다.

예술에는 공포를 표현하는 많은 작품이 있다. 손창섭처럼 훼손된 신체를 통해 공포에 휩싸인 내면을 보여 줄 수도 있고 뭉크처럼 절규에 빠진 표정으로 공포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일상의 공포를 가장 절묘하게 드러낸 이미지라면 단연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김언의 시 ‘거품인간’에는 “공기가 그를 껴안을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거품을 이루는 건 공기다. 거품인간은 공기에 안긴 인간이자 공기를 안고 있는 인간이다.

우리를 안고 있는 것도, 우리가 안긴 것도 비어 있는 무엇이다. 따라서 언젠가 꺼지고 말 거품에 안겨 있는 우리는 윤곽 없는 존재들이다. 맥주잔에 남겨진 자국처럼 흔적만이 거품의 존재를, 거품을 안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희미하게 입증한다.

‘거품인간’이 수록된 시집 ‘거인’의 개정판이 출간됐다. 벌써 두 번째 재출간이다. ‘거인’이 거듭 출간되며 읽히는 여러 이유 중에는 ‘거품인간’이 환기하는 공포의 감각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직면하는 진실된 두려움 말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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