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미분류  >  미분류

[가리사니] 위기의 타블라오



더 이상 화려할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마음을 저 밑바닥까지 저릿하게 만드는 기타 연주에 잠시 정신을 놓았다. 낯선 언어의 구성진 목소리가 기타 선율에 얹어졌다. 검은 치마를 입고 붉은 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무용수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무대 앞으로 나왔다. 춤은 힘이 넘치고 절도 있었지만 무용수의 손끝이 애절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음이 급격히 오르내리는 동시에 길게 늘어지는 가수의 노래에선 한(恨)이 느껴졌다. 점점 빨라지는 기타 소리와 박수 소리, 발 구르는 소리가 심장 박동수를 높이는데 꼭 눈물을 쏟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슬픔이 이렇게 해석될 수 있구나.’ 2006년 가을의 일이었다.

스페인 세비야의 골목골목에는 식사와 플라멩코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인 타블라오가 많다. 수도 마드리드, 대표적인 관광도시 바르셀로나에도 제법 규모 있는 타블라오들이 있다. 그래도 세비야의 타블라오에 가고 싶었던 건 안달루시아라는 지역의 문화·역사적 특징,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분위기 때문이었다.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인 플라멩코는 스페인 문화를 대표한다. 무슬림들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 코르도바에 수도를 세우고 800년 가까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스페인 문화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 예술과 건축, 음식 등 전반에 걸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영향을 모두 받은 독특한 형태를 띤다. 플라멩코도 마찬가치다.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같은 이유로 세비야와 그라나다, 코르도바를 찾고 그 도시의 타블라오를 찾았을 거다. 관광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2%를 차지하는 스페인에서 타블라오는 여행자들에게 흥미로운 장소다. 타블라오는 플라멩코 공연자들이 경력을 시작하고, 쌓을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세대를 이어 플라멩코의 명맥을 이어가는 장소인 셈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타블라오들이 대부분 문을 닫으면서 플라멩코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관광객 급감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영업제한 때문이다. 후안 마누엘 델 레이 전국타블라오협회 회장은 “타블라오는 플라멩코 예술가 95%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팬데믹 이후 전국의 타블라오 93곳 중 34곳이 완전히 문을 닫았다”면서 “정부의 추가 지원 없이 플라멩코는 곧 멸종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마드리드의 ‘비야 로사’, 바르셀로나의 ‘팔라시오 데 플라멩코’ 등 관광객을 끌어모으던 유명 타블라오들도 얼마 전 폐업 소식을 알렸다.

연극, 뮤지컬, 오페라, 콘서트 등 모든 장르의 공연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다. 팬데믹으로 연극, 뮤지컬, 오페라, 콘서트 등 모든 장르의 공연은 위기에 처했다. 예술가들이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찾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반 대중의 인기에 기대기 어려운 전통 공연 예술은 위기에 더 취약하다. 이 장르는 한 국가와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문화 구성원들의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콘텐츠의 종말을 막을 수 있다. 바르셀로나 ‘타블라오 데 카르멘’ 대표 미모 아구에로는 “특히 젊은 세대는 플라멩코와 타블라오가 관광객뿐만 아니라 우리의 집단 정체성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지 못해왔다”면서 “불행히도 우리는 잃을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중요성을 실제로 그것을 잃은 후에야만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세비야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와 플라멩코 학원에 등록했다. 열 명 남짓한 현지인들 사이에서 플라멩코 춤의 기본 손동작과 발구르기, 손뼉치기를 배웠다. 하지만 기간 내 어학 자격증도 따야 하고 무엇보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유학생의 ‘무용’담은 결국 두 달을 가지 못했다. 그래도 종종 플라멩코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젠가 다시 플라멩코를 배우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보다도, 세비야의 뒷골목에서 타블라오 생존기를 들을 수 있길 기대한다.

임세정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fish813@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