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아버지 순교지에 돌아온 아들, 원수를 사랑으로 갚다

이판일 장로, 이판성 집사 형제의 순교지인 전남 신안 임자도 ‘백산 솔밭’ 현장. 2017년 성결교인들이 순교자의 “용서하라”는 뜻을 받들어 기념비를 세웠다. 신안지역 순교사적지를 안내한 변정섭 목사(왼쪽·목포 옥빛교회)가 대파밭 주인과 대화하고 있다.



 
이판일 (1897~1950) 열세 살에 두 살 많은 임소애(순교)와 결혼. 슬하에 3남 4녀. 1932년 무렵 문준경 전도사로부터 신앙을 접한 후 임자교회(진리교회) 장로가 됐다. 30년대 후반 교회 사역자가 부임하지 않자 교회를 이끌고 인근 교회를 돌보았다. 일제 말 동방요배 강요를 거부해 목포경찰서로 압송당했다.
 
이인재는 ‘백산 솔밭’ 마을 대기리에 대기리교회를 설립했다.
 
이판일 일가가 섬겼던 임자도 진리교회. 지난달 19일 섬이 연륙 됐다.
 
이인재 (1922~2009) 이판일의 장자. 6·25전쟁 당시 목포에 살아 화를 면했다. 할머니 부모 여동생 등 가족 13명의 시신을 거둬야 했다. 1958년 서울신학교(서울신대) 졸업 후 목사가 되어 임자 대기리교회 개척, 증도 증동리교회·목포 상락교회, 임자 진리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2008년 국제사랑재단 제1회 원수사랑상 수상.
 
이판일 장로의 아들 이인재 목사 가족. 충남 청양 미당교회 사역 시절.
 
임자도 임자중앙교회 옆 992명 위령비. 좌우익에 의해 양민이 학살됐다.


지난달 19일 전남 신안군 임자도와 지도를 잇는 임자대교가 개통됐다. 1975년 지도가 연륙 되었으므로 이제 임자도도 뭍이 됐다. 개통 1주가 지나 임자도 진리교회로 향했다. 지도 점암선착장에서 임자도 진리선착장까지 최소 30분 배를 타고 건너야 했던 섬은 자동차로 불과 3분 만에 닿았다. 부속 도서 재원도 등을 안고 있는 이 섬은 한국기독교 순교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으로 용서했다면, 이 섬 순교자 이판일 장로의 아들 이인재 목사는 아버지의 원수를 용서했다. 그 용서의 기도가 서해의 수많은 섬으로 퍼져나가 결신의 열매를 맺었다.

이판일의 순교지 임자도 ‘백산 솔밭’. 이곳은 임자 진리교회에서 3㎞쯤 떨어진 대기리 대파밭가에 있었다. 1950년대만 해도 바닷물이 들고 나는 뻘이었고 그 수롯가 솔밭에서 이판일과 그 가족 12명은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300여명의 무고한 양민과 함께였다.

이판일은 진리 태생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섬 소년이었다. 그때 임자도는 목포에서 5시간 항해 끝에야 닿을 수 있는 섬이었으나 열정적인 전도자 문준경(1950년 순교) 등의 섬선교로 복음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1932년 무렵 경성신학교 신학생 문준경이 임자도 옆 증도를 거점으로 도서 순회 선교를 했다. 문준경은 훗날 ‘임자도교회 부흥기’라는 글에서 이판일과의 만남에 대해 ‘그가 깨뜨려졌다’고 적었다.

이판일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가부장적 의식이 강한 한 집안의 장자였다. 20대 후반 그의 아버지 이화국이 죽고 어머니 남구산과 남동생 판성 등 4형제를 책임져야 했다. 이 의식의 장자권은 그를 성실하고 근면하게 했다. 어느 날 문준경이 이판일에게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이라며 성경을 건넸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판일은 “예” 하고 고백했다. 그리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신앙생활 또한 성실과 근면이었다. 그는 이내 섬 교회 장로(영수)가 됐고, 집사가 된 동생 판성(1907~1950) 등 온 가족과 예수를 섬겼다. 진리교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발발 후인 10월 5일 이판일은 ‘백산 솔밭’에서 무참히 살해됐다. 어머니(당시 78세), 동생 판성 등과 몰살당한 것이다. 그 현장은 비단 그리스도인 이판일 가족만이 아니었다. 지주이거나 배웠거나 예수쟁이면 반동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다. 그 솔밭 구덩이에서는 대창에 찔리고, 총상에 목숨이 붙어 있던 부상자의 신음이 몇날 며칠 이어졌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 구할 수가 없었다. 산 자들은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살아 지옥이었다. 1950년 9·28수복 이후에도 지방 치안은 좌익세력이 장악한 곳이 많아 이런 만행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임자도도 그랬다.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살육의 현장에 2017년 5월 15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가 ‘순교 터 기념비’를 세웠다. 조금이나마 영혼들에 위로가 되었을까. 그러나 현실은 ‘대파 대란’에도 중간상의 폭리로 목돈을 쥐지 못한 농사꾼들의 한숨 소리였다. 지반이 약한 기념비 둘레의 소나무는 뿌리가 드러나고, 불과 5년밖에 안 된 기념비 추모글 판석은 떨어져 나간 채 갈라졌다. 판석을 들어 반듯하게 세워놓으려 하자 그 밑에서 버려진 인골이 나왔다. 대파밭 주인은 심심찮게 나온다고 했다. 300여명의 희생자 인골일 것이라고 했다.

이판일은 일제강점기에도 살아남았다. 신사참배 거부와 교회가 폐쇄되는 곡절을 겪고서도 말이다. 그는 동방요배 거부 등으로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에서 같은 민족에 희생당했다.

“내 어머니만은 살려주실 수 없소.” 형제가 ‘백산 솔밭’으로 끌려가며 말했다. 형제는 탈진한 어머니를 업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갔다. 밤 2시. 구덩이에 던져진 생명의 비명이 하늘로 퍼졌다. “주님 이 악당들의 죄를 사하소서.” 그러나 그들은 “죽는 놈이 무슨 기도냐”며 몽둥이로 내리쳤다. 그리고 돌들이 던져졌다. 이판일의 딸 완순(당시 8세)은 뒤늦게 좌익세력에 발견되어 살해된 후 갯벌에 버려졌다. 13인의 가족은 그렇게 몰살을 당했다.

10월 19일 이판일의 아들 인재가 목포에서 해군 ‘백부대’와 함께 임자도로 들어왔다. 그는 백산 솔밭으로 달려가 생매장된 시신을 뒤졌다. 부패한 시신으로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인재는 한 시신의 주머니를 뒤지다 인민군 목포 정치보위부장이 끊어준 ‘여행증명서’로 아버지의 시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좌익들이 물러가고 임자도는 치안 공백이었다. 이번엔 우익에 의한 좌익가족 살해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이인재가 부역자 색출의 치안책임자로 들어왔다. 그는 손끝 하나로 철천지원수들을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었다. 분노에 찬 새벽기도. “아들아. 내가 그들을 용서했다. 너도 용서해라. 원수를 사랑으로 갚거라.”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진리교회 예배당에서 가까운 임자초등학교 뒤편 ‘위령비’. 전쟁 직후 세워진 992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이 비에는 박꼼둥 노똥고 김원통 이섭섭 등 이유도 없이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는 추모공원이 있다. 그리고 진리교회 마당에는 48인의 순교자 이름이 비극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뭍이 된 섬 임자도. 사탄의 흉계에 빠져 하나님 주신 본성을 버린 이들이 벌인 대살육의 현장.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말씀이 왜 진리가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순례지인 것이다.

신안·목포=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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