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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광동 (8) 믿음 없던 젊은 시절 술친구가 믿음의 동지로

김광동 대표가 주중 대사관 근무 시절인 1995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1995년 2월 중국 베이징의 주중 대사관 경제 공사로 부임했다. 이것은 기도 응답이었다. 그 무렵 하용조 목사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나라가 계속 생각나고, 그 나라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선교사로든 무엇으로든 그 나라로 가야 합니다”라고 설교하셨다. 중국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중국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서 언젠가 중국에서 근무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

지금은 목사가 된 문봉주 당시 심의관도 6개월 뒤에 주중 정무 공사로 발령받아 나와 함께 중국에서 근무했다. ‘문봉주 대사의 성경의 맥을 잡아라’ 저술로 유명한 문 공사는 사실 나와 젊은 시절 술친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태신앙인이었지만 한창 어울릴 때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본부 통상 심의관으로 부임하고 그가 아주국 심의관으로 귀국했는데 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친 곳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교회였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문 공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나보다 조금 앞서 회심한 듯했다. 우리는 역전의 용사처럼 다시 한번 의기투합했다. 이번엔 술이 아닌 말씀과 기도로 견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훗날 주중 대사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김하중 장로님도 곧 믿음의 동지가 됐다. 김 장로님은 ‘하나님의 대사’ 시리즈를 포함한 여러 편의 신앙서적을 집필했으며, 국내외에서 말씀 집회를 여는 등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

우리는 믿음 없던 젊은 시절을 함께했기에 각자 회심한 이후 성령 안에서 무시로 소통하는 관계가 됐다.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서로 기도로 응원했다. 하 목사님은 나와 김 장로님과 문 공사를 한데 묶어 ‘외교부의 돌탕 삼인방’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돌탕’은 돌아온 탕자의 줄임말이다. 우리 돌탕 삼인방은 2004년 함께 장로 장립을 받고 각자 자리에서 하나님 사역을 잘 감당해가고 있으니 은혜중에 은혜다.

중국에서 신앙생활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장감이 넘쳤다. 외교관, 언론사 특파원, 상사원 등 한국인이 많이 사는 베이징 차오양구의 북경 한인교회에 다니게 됐다. 중국은 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삼자교회가 아닌 이상 대외적으로는 교회로 부를 수 없다. 목사님도 선생님으로 불러야 했다. 그런데도 알음알음 모인 한인 그리스도인이 700명이나 됐다.

96년 2월 느닷없이 온 교인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3월 말 끝나는 임대차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공산당 입김이 작용한 것을 교인 누구나 짐작했다. 기한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예배 장소를 갑자기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나는 목사님께 3월 한 달간 온 교인 새벽기도를 하자고 제안했다. 황사가 유난히 짙던 그해 우리는 또 한 번의 기적을 경험한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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