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미국 열차에서 출발한 하나님 선교 역사, 조선에 이르다

서울 YMCA 뒤편 중앙감리교회 ‘가우처 기념예배당’ 터(노랑 점선). 1920년대 건립된 예배당은 1975년 민간에 매각됐고 2015년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 왼쪽 위 붉은 예배당은 승동장로교회. 강민석 선임기자



 
존 프랭클린 가우처 (1845~1922)
 
매클레이 선교사와 김옥균. 조선의 교육·의료 선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 청산학원대학의 관동대지진 전 모습. 가우처 기부로 세워졌다.
 
1950년대 추정 승동교회 뒤로 보이는 가우처 기념예배당(화살표).
 
2004년 출판사 창고로 사용되던 기념예배당. 이덕주 감신대 교수 제공
 
현재의 태화빌딩(옛 태화관), 하나로빌딩(중앙교회), 승동교회 모습.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 종로 YMCA 건물 뒤편 선교 유적 ‘가우처 기념예배당’은 기독교대한감리회 모 교회 중앙교회(옛 종로교회)가 1975년 이 예배당을 민간에 매각하고 불과 100m 지점에 교회를 겸한 12층 높이 ‘하나로빌딩’에 입주하면서 지워졌다.

가우처 기념예배당은 1923년 미국감리회 한국연회가 ‘미국 감리교회 해외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예배당이었다. 200㎡(60평)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적조 건축물이었다. 아치가 아름다운 고딕식 창문이었다. 만약 이 아담한 100년 전 예배당을 리모델링해 보존했더라면 덕수궁 옆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만큼이나 영성 깊은 공간이 됐을 것이다. 서울 영등포 경성방직 옛 건물처럼 카페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이 예배당은 불과 5년여 전까지 남아 있었다.

미국 볼티모어 가우처대학 총장 존 프랭클린 가우처(목사)를 우리는 근대사 시간에 배웠다. 1883년 7월 한·미 친선 및 교섭을 위해 조선 정부가 파견한 보빙사 사절단은 전권대신 민영익과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변수 등 총 11명이었다. 이들은 한 달 걸려 샌프란시스코에 닿았고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수도 워싱턴으로 향했다. 횡단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인디언을 닮은 갓 쓴 사절단은 구경거리였다.

이 기차 안에서 사절단 일행에 강한 인상을 받은 이가 바로 가우처다. 그는 사절단 안내자 퍼시벌 로웰(1855~1916)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됐다. 마침 미국에서 대각성운동이 불타오른 때여서 가우처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땅 조선을 위해 기도와 헌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2000달러의 선교기금을 모아 미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 목적 헌금한다.

그러나 선교부의 조선 선교 의사 결정이 늦어지자 가우처는 1884년 1월 31일 일본 주재 감리교선교회 책임자 로버트 매클레이 목사에게 편지를 쓴다.

‘목사님께서 직접 조선을 한 번 방문해 보시고 전망을 타진해서 선교사를 파송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1895년 미 감리회 선교보고 자료)

이에 매클레이 부부는 그해 6월 조선을 방문, 고위관리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교육’과 ‘의료’를 윤허해 달라는 친서를 보내고 이어 알현한다. 김옥균은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3차례 오가며 매클레이와 닿아 있었다. 매클레이 부인이 당시 조선인 시찰단원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김옥균이 이에 사의를 표하면서 인연이 됐다고 한다.

고종은 7월 3일 매클레이 알현에 “당신의 협회가 조선에서 병원과 학교 사업을 개시할 것을 윤허한다”고 밝혔고 이에 미북감리교회는 ‘즉각적으로 선교사업을 개시하였다.’(선교보고 자료)

이와 동시에 가우처는 미 감리교신문에 조선 선교에 대한 긴급성을 호소하는 한편 ‘기독교대변인’지에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15편 이상의 논문을 게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캘리포니아에 사는 9세 소녀 파울러가 낸 9달러 등을 포함 1000달러의 선교기금이 걷혔다. 가우처와 파울러의 선교헌금 등이 서울 정동교회 용지 매입 등의 발판이 됐다.

‘가우처와 보빙사 일행의 만남’을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신 놀라운 은총”이라고 설교한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우처를 통해 극동 한국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감리교회는 가우처를 ‘조선 선교의 아버지’라 높인다.

실제 가우처는 미국 서부에 175곳의 교회 개척에 힘쓴 전도자이자 교육자였다. 그리고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 동양 선교에 헌신했다. 일본 청산학원대학, 중국 푸저우의 신학교와 톈진의 여성병원 등을 설립했고 북인도에 60곳의 가우처학교를 세웠다. 특히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교육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가우처대학 전신이 볼티모어여자대학이었다.

이런 그가 조선의 교육과 의료선교의 뜻을 이루자 직접 여섯 차례나 방문해 배재학당(배재대), 이화학당(이화여대), 조선기독교연합대학(연세대 전신), 평양 미션스쿨 등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 6차 방문(1920년 10월) 때는 미국 주일학교 대표 50여명과 위의 학교를 방문하고 순직한 아펜젤러 홀 현판식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기독교교육과 근대 고등교육의 공로자였다.

한편 소녀 파울러가 9달러를 냈듯 조선의 가우처기념예배당도 작은 손길이 모여 가우처 별세 후 헌당됐다.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는 “향정동으로 불리던 기념예배당 터는 아펜젤러가 매서인들의 전도 장소로 매입했고 이어 최병헌 목사(정동교회 2대 목사)가 살면서 대청을 예배당으로 사용한 것이 종로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이어 “가우처 기념예배당은 당시 한국의 남·북감리교회가 연합하여 3000여명이 동시 집회를 열 수 있는 중앙전도기관을 목표로 진행됐으나 합동이 쉽지 않아 작은 예배당이 됐다”고 덧붙였다.

종로교회는 1931년 기념예배당을 증축해 1975년까지 성전으로 이용하다 대지 1700㎡(510평)를 기념예배당과 함께 성지출판사에 팔고 만다. ‘수학의 정석’의 저자 홍성대(전주 상산고 설립자) 박사가 넘겨받았다. 이후 예배당은 아치형 창문을 시멘트로 메꾸고 출판사 물류 창고로 사용되다 2015년을 전후해 철거됐다. 중앙교회는 2015년 지금의 하나로빌딩 내에 가우처기념예배당 헌정 예배와 가우처 흉상 제막식 및 관련 출판물 행사를 했다.

예배당 매각 당시 한국교회가 기독교 역사 유적에 대한 열의만 있었더라면 수학 교육자였던 홍성대 박사의 이해를 구해 보존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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