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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노빈손 세대’와 수평적 리더십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박경수·박상준 글, 이우일 그림, 뜨인돌)는 배낭여행을 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노빈손이 바닷물을 증류해 식수를 만들고, 물렌즈를 이용해 불을 피우면서 생존하는 모습을 그린 책이다. 게임 형식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읽어 나가다 보면 과학 지식은 팁으로 제공된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99년에 출간돼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남극이나 아마존 등으로 무대를 바꾸며 ‘신나는 노빈손 어드벤처’ 시리즈가 계속 출간돼 10년 이상 인기를 이어갔다.

‘서바이벌 만화 과학상식’(아이세움) 시리즈는 같은 개념의 이야기를 만화에 담았다. 주인공 일행이 무인도, 화산, 동굴 같은 극지 상황에 조난됐다가 살아남기를 시도하는 이야기를 코믹한 스토리와 그림으로 그려냈다. 이들 시리즈는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책들을 읽고 자란 30대를 ‘노빈손 세대’라 부르기로 하자. 이 세대는 빈손으로도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다. 이들이 자라는 동안 경제적 위기가 꾸준히 지속됐다. 고성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멘붕, 헬조선, N포세대 등의 신조어가 탄생한 것을 보면 이들은 늘 ‘서바이벌’을 화두로 삼으면서 절박한 삶을 살아냈다고 볼 수 있다.

60대인 나는 최근에 젊고 발랄한 상상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의 편집위원을 30대 중심으로 바꿨다. 그들과 일하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들은 부모세대가 ‘산업화’와 ‘민주화’ 세대로 나뉘어 피 터지는 공격을 일삼았던 것과 달리 상호 비판을 최대한 삼갔다. 회의를 할 때에도 반박은 최대한 자제하고 자신의 생각만 펼치곤 했다. 그런데도 묘하게 논쟁이 됐고, 쉽게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도 엄격한 룰을 세우지 않았다. 늦게 도착하거나 일찍 떠나도 문제 삼지 않았다. 6개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도 제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논의된 것을 공유하곤 했다. 어느 곳에서 일하든 살아남아야 하는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임을 꾸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가 어떤 사안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면 누구든 그에 대한 정보를 큐레이션한 다음 카톡으로 전해주곤 했다.

다시 주변을 살펴보니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30대는 서로 존중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운영하는 회사의 편집자들도 대부분 30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책을 기획하면서 서로에게 간섭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움을 주고 있었다. 바로 서로에게 거울이 되는 수평적 리더십의 실천자들이었다. 수평적 리더십의 기본 원리는 ‘소통 공감 동행’이다.

21대 총선에서 30대와 40대는 비슷한 성향을 드러냈다. 한 출마자는 “30대 중반에서 40대는 논리가 아니라 막연한 정서이고, 거대한 무지와 착각”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비난을 쏟아냈지만 이들은 진보와 보수라는 낡은 진영 논리에 빠진 사람들을 배척했다. 그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쌓은 세대다. 그리고 현장에서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소셜을 활용해 집단지성이 돼 대안을 찾아내는 것을 즐기고 있다.

코로나19 전쟁의 와중에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자존심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세계는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을 몰고 올 조짐이지만 세계 시민은 코로나19 전쟁을 의연하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노빈손 세대’의 수평적 리더십을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나라는 세계를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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