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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이 빛이 한 줄기 햇볕이기를”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진 속 저 여성은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까. 어쩌면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의 저자처럼 조울의 터널 속을 걸어가고 있을 수도 있겠다. 책에는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픽사베이




‘가난 사파리’의 서문을 읽고 영국 그렌펠타워 화재 사건 장면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런던의 고층 아파트에 검은 재가 휘날리고 있던, BBC 뉴스에서의 한 장면이 전부다. 2017년 6월에 일어난 일이니 불과 3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사이를 채운 갖가지 크고 작은 뉴스는 먼 나라의 화재 사건까지 일일이 기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특히 2020년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는 바이러스의 재난은 더욱 그렇다. 추상적 개념으로만 일컬어지던 ‘뉴노멀’이 뜻하지 않은 코로나19 사태로 구체적 양상이 되어 일상 한가운데 나타났고, 런던의 화재는 이제 지난 일인 것만 같다.

‘가난 사파리’의 본문을 읽으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그렌펠타워는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불타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불을 구경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한창이던 지난 4월 29일에는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에 불이 나 38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재택근무니, 원격근무니 하는 것에서 배제된 (가난한) 노동자다. 공사 현장은 그렌펠타워처럼 화재 위험성이 우려되었으나, 자본주의적 효율성 앞에 경고등은 무시되었다. 그렌펠타워의 현시는 화재사고가 아닌 전염병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수도권 집단 감염의 대표적 사례가 된 구로 콜센터와 부천 쿠팡 물류센터의 노동자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애초에 불가능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화재사고가 나면 카메라는 오열하는 유가족을 비춘다. 보상액이나 보험금 따위를 주요한 정보인 듯 다룬다. 물류센터의 확진자 동선은 방역의 필요에 의해 밝혀지지만, 그 동선이 진열하듯 보여 주는 것은 이른바 하위 계층의 삶 그 자체이다. 화마와 역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그것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시스템은 사람을 가린다. 시스템에 의해 보다 안전한 구역에 위치한 우리는 위험에 노출된 그들을 엿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마치 사파리에 온 것처럼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사뭇 다른 주제를 택해 책을 골라 보았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는 사파리 속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여러 동물이 사는 초원보다는 제목처럼 사막이 어울릴 법한 책이다. 별명이 ‘삐삐언니’인 저자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우울증을 앓는다. 조울병이 발병한 것은 2001년이고 2006년 재발했으며, 사막을 건넜다는 지금도 언제든 병이 재발할 수 있음을 안다. 한때 폐쇄 병동에도 입원했지만 지금은 기자로서, 개인으로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렇게 “최근 몇 년간 조울병과 그럭저럭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는 휴전선의 철조망만큼이나 날카롭고, 그 안의 짐승처럼 날것이며, 거기에 막 배치된 신병처럼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저자의 목소리를 듣는 독자의 마음속 목소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날카롭고, 날것이며 그래서 마주보기 두려운 각자의 감정과 심리 때문일 것이다.

엊그제 출근길에서는 운전을 하다 혼자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어떤 일에 미친 듯이 집중했다가, 다음 집중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조급해하고 속상해한다. 나만 빼고 모두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다. 억울한 마음에 남을 험담하고 자신을 과장한다. 타인의 눈치를 보다가도, 나만큼 눈치를 보지 않는 그에게 필요 이상의 서운함을 느낀다. 싸늘해졌다가, 뜨거워진다. 울고 난 것처럼 언제나 눈두덩이 뜨겁다. 안구건조증이겠지만, 건조한 게 안구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로 생각되고, 어디에 도망갈 곳 하나 없음에 절망한다…. 이 책을 추천한 지인에게 이런 마음을 털어놓았더니 가까운 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시간을 내어 거기에 갈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삐삐언니는…’는 안전한 거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만난 타인(삐삐언니)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병증은 아니겠지만, 내가 지금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일상의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 듯하다. 그보다 먼저 “주춤주춤하면서도 전진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그만큼 스스로를 사랑”한 이 책의 모든 문장에서 어떠한 ‘빛’을 발견했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 빛이 화재를 일으키는 사고가 아닌, “한 줄기 햇볕”임을 믿는다. 그 빛을 조명 삼아, 곁의 누군가와 용기와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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