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서해안·금강 따라 뱃길 전도… ‘호남 복음화’ 길이 되다

전북 군산 비응항-고군산열도-부안 변산을 잇는 새만금방조제의 해질 녘 풍경. 사진의 섬은 고군산열도이다. 사진 속 붉은 십자가가 빛난다. 고군산 지역은 복음화율이 30~35%에 달해 전국 최고다. 19세기 말 전킨 선교사는 군산선교부를 전진기지로 수로를 따라 복음을 전했다. 서종표 목사(군산중동교회) 제공
 
전킨·드루 선교사가 타고 온 군산포 기범선.
 
군산 대야 만자산교회(지경교회) 초기 기념사진.
 
군산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와 복원된 영명학교. 전킨 선교사 등이 설립했다.
 
초기 교회에서 사모 메리 레이번과 두 자녀.
 
전킨을 기념하기 위한 전주서문교회 종탑.




“주일예배 등록인이 40명입니다. 예배드리는 방은 종이문막이에 의해 두 개의 방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남녀가 다른 방을 사용합니다. 주일예배에 앞서 ‘크리스천의 준수자’란 책을 번역하여 한 장씩 공부시켰습니다. 설교 제목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헌금 시간을 가졌습니다. 16불6센트와 엽전 530전이었습니다. 이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1897년 어느 주일. 호남 선교의 개척자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가 전북 군산에서의 예배 모습을 미국 남장로회선교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이러한 전킨은 1907년 12월 31일 전북 전주선교부 사택에서 이런 말을 남기고 사흘 후 하나님 품에 안긴다. “나는 집으로 간다. 나는 행복하다(I am going home, I am happy).” 급성 장티푸스와 폐렴이었다. ‘전 목사가 우리나라에 오신 지 16년에 전라도에서만 교중사무를 주관하셨으니…슬프다…눈이 어둡고 기운이 막혀서 기도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도다.’(1908년 1월 15일자 ‘예수교신보’)

복음화율 최고 군산·고군산

‘대한민국복음화지도’를 보면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권역(30~35%) 세 곳이 나온다. 전북 군산·익산, 전남 신안, 인천 강화권역이다. 복음화율은 서부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그 비율이 떨어진다. 개항장 제물포(인천), 군산, 목포가 복음의 전진기지였다.

그 가운데서도 전북의 복음화율은 시·도 단위 중 최고다. 그 이유는 미국 유니언신학교를 나와 1892년 제물포에 도착, 호남 선교에 나선 전킨 때문이다. 그는 1893년 테이트(최의덕) 선교사 등 7인과 호남 선교답사를 마치고 1895년 3월 기범선을 타고 군산에 도착했다. 본격적 호남선교의 시작이었다.

지난달 말. 고군산열도를 잇는 서해안 대역사 새만금방조제를 차로 달렸다. 고군산열도(선유도·신시도 등)는 뭍이 됐다. 뭍이 되기 전에도 고군산열도는 어느 섬이나 예배당 없는 곳이 없었다. 선유도교회는 30여년째 오흥덕 목사가 묵묵히 제단을 지키고 있었고, 옆 신시도교회는 필리핀에서 시집온 아르세니아 집사가 토박이 남편 박병근 집사와 섬기고 있었다. 전킨이 뿌린 씨앗 열매와 같은 이들이다.

전킨과 의료선교사 드루(1859~1924)가 군산포 바닷가에 처음 배를 대었을 때 사실 군산은 가난하고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남자들은 취해 도박판을 벌였고, 여자들은 미신에 빠져 있었다. 두 선교사는 군산 수덕산 자락(현 월명공원 일대)에 초가 두 채를 50달러에 구입, 전도를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갯벌과 높은 습도, 내일 목숨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풍토병 등 어느 것 하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겨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동학 농민군이 봉기한 고부(현 정읍시 고부면)가 200리(80㎞) 밖에 불과했다. 1894~95년 조선은 동학농민혁명과 이어진 청일전쟁으로 척왜척양의 기치가 높았다. 그들은 서양 선교사에게 돌팔매질로 반감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다가가 환자를 돌봤다. 외상·피부병 환자 같은 경우 기적과 같은 체험을 했다. 사람들은 생선과 굴, 미역 등을 가져와 선교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예수가 한센병 병자를 고쳐준 것처럼 그들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번졌다. 드루는 치료를 했고, 전킨은 쪽복음을 전했다. ‘야소가 어떤 사람인가’ 질문하는 이들이 늘었다. 두 사람은 배편을 이용해 멀리 서해 고군산과 금강 상류 강경까지 오갔다.

그러나 첫 선교지는 일제의 수탈이 시작되면서 밀려나게 됐다. 1899년 개항장이 되면서 일제가 수덕산 일대를 조계지 삼았고 전킨은 외곽 구암동(옛 지명 궁멀)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전킨과 드루는 그곳에 ‘군산선교부’를 세우고 선교·교육·의료 사업을 강화했다.

1897년 남장로회 한국선교부 통계에 따르면 서울과 전주의 세례 및 학습 교인이 각기 11명과 7명에 불과할 때 군산은 13명이었다. 전킨은 심방을 통해 학습 교인을 살폈고 그들에게 구세주가 누구인지를 가르쳤다. 교인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반면 해안 습기 등으로 전킨은 조금씩 쇠약해졌다. 전킨은 서울과 군산에서 아들 셋을 풍토병으로 먼저 보냈다.

“나는 궁멀 전씨 전위렴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전도 열정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영명학교(군산제일중·고), 멜볼딘여학교(군산영광여중·고), 군산예수병원 등이 속속 들어섰으며 구암동산을 중심으로 김제 전주 고군산 서천 논산 부여 등이 순회 선교로 복음화됐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 등은 전도를 위한 수로 아스팔트였다.

그런데 그의 체력이 바닥났다. 말과 함께 다리에서 추락한 후 갈비뼈가 부러졌고 그 후유증으로 편도선이 악화했다. 아내 메리 레이번도 염증으로 고생이 심했다. 1904년 남장로회 조선선교부는 전킨에게 강제 휴식을 권했다. 습기가 덜한 전주교회(전주서문교회)로 발령을 내고 20리 밖으로 순회전도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도 전킨은 의료선교사 포사이트와 함께 걸식 아동을 먹이고 입혔다. 노방전도와 축호전도에도 열심이었다. 요절한 전주지역 고아의 어머니 방애인(기전여학교 교사)의 신앙의 뿌리 역시 전킨이었다. 찬송 ‘거두리로다’의 주인공 이거두리(이보한)도 전킨의 지도를 받았다.

지난해 전킨기념사업회가 전킨의 외손자 프레스톤으로부터 입수한 120여년 전 전킨의 선교 사진을 공개했다. 사업회 서종표 위원장(군산중동교회 목사)이 전킨의 고향 버지니아 크리스천 버그 등을 추적·답사한 결과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조선을 사랑했다.

그가 본향으로 향하며 마지막 한 말은 이러하다.

“나를 궁멀(군산 구암동)에 묻어주길 바랍니다. 저는 ‘궁멀 전씨 전위렴’입니다.” 그는 궁멀의 아들들 옆에 묻혔다.

전킨 (1865~1908) 연보

·1865년 미국 버지니아 태생
·1891년 언더우드 조선선교보고대회서 조선선교 자원
·1893~94년 호남선교 예비 답사
·1894년 큰아들 조지 풍토병 사망
·1895년 군산포 도착, 교회 설립
·1896년 군산선교부 설립
·1899년 아들 시드니 사망
·1903년 아들 프란시스 사망
·1904년 전주교회 부임
·1907년 호남지방 대부흥운동 주도

군산·전주=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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