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가장 어리석은 선택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합니다. 그는 유대사회 지도층 인사 가운데서도 존경받는 명사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기도 하고 부자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면 이 시점이야말로 최악입니다. 예루살렘 전체가 예수님께 적의를 품고 등을 돌렸으며 십자가형을 외쳤고 끝내 십자가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결정으로 잃을 것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요셉의 커밍아웃은 또 한 사람을 예수님의 시신 곁으로 불러냅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조용히 찾아온 적이 있는 니고데모입니다. 그도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니라 뜻밖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요셉은 자신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새 무덤에 시신을 안치했고 니고데모는 30㎏이 넘는 장례용 향유를 가져와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결정입니다. 아마 다른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난하고 질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한 시점에 머물러 화석화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재해석됩니다. 그들의 ‘가장 어리석은 선택’과 다른 사람들의 ‘가장 영리하고 똑똑한 선택’의 기준은 어느 순간 뒤집힙니다. 얼마 있지 않아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촉망받던 사울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각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나라에 대한 진지한 열망입니다. 진리에 대한 강렬한 욕구입니다. 영원에 대한 끝없는 추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각각 다른 시점에서 예수님을 찾거나 만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만났건 그들은 동일한 BC와 AD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 세상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단지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일 뿐 ‘가장 지혜로운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이익이 아무리 클지라도 영원한 가치와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류는 그동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른 채 달려왔습니다. 갑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 걸려 넘어져 존폐의 기로에 섰습니다. 멈출 수 없기에 질주해왔는데 멈추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멈추고 보니 무엇을 잃고 살았는지 비로소 눈에 띕니다.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으나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인간이 바이러스 때문에 멈춘 것이 아니라 지구가 인간을 멈추기 위해 바이러스를 백신으로 택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수긍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조급하고 탐욕스러운 선택이 복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시고 진실로 추구해야 할 팔복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의 선택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넓은 문, 넓은 길의 선택이 정말 어리석은 것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선택은 모래 위에 서둘러 집을 짓는 결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대의 지도자들은 모두가 멈추어야 할 시점에 서둘러 일어나 계속 달리겠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을 과신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이 시대의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바울이 경고합니다. 자칫 크리스천이 그 선택의 가치를 놓친다면 실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들’보다 더욱 불쌍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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