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칼럼] 예배는 죽음으로 다시 사는 것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을 한다. 아브라함의 말이다. 들어보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세기 22장 5~6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예배드리러 갔다가 온다고 한다. 지금 이삭을 그 예배에서 번제물로 바치러 가는 길인데 어찌 다시 같이 온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예배를 부활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예배에서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매우 계산적인 사람이다. 잃는(lost) 것과 얻는(gain) 것의 대차대조표를 잘 그린다.(빌 3:8) 그는 진짜 장사꾼, 영적 장사의 고수(高手)였다. 죽음(lost)과 부활(gain)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권능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 길은 먼저 죽어야 가능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기 전에는 부활을 알 수 없다.(빌 3:10~12) 예수님의 철저한 죽음과 그 부활의 영광은 예배 가운데서 가장 잘 볼 수 있다.(빌 2:5~11) 예수님이 잃은(lost) 것과 얻은(gain) 것이 무엇인지 예배는 말해준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면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을 수 있고(lost)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 권능을 가질 수 있다.(gain)

요한계시록 1장을 보자. 밧모섬에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있었다. 노(老) 사도 요한이었다. 어느 주일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죽은 자같이 됐다. 예배자의 모습이다.

그를 찾아온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이었다. 예배의 자리에서 자신을 죽은 자같이 내놓았던 요한은 놀라운 계시의 기록자로 일어섰다.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렸던 작은 예배자 요한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을 받았다.

뉴욕에 노 사도 요한과 같은 분이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에 감염돼 지난 성금요일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분이다. 그는 유학생 시절 중국인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그에게 그 웨이터 자리는 너무 소중한 자리였다.

어느 토요일 자정이었다. 그는 웨이터들이 목에 매고 일하는 보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일을 멈췄다.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에서 일을 멈춘 것은 그 식당을 그만두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유학생은 왜 그렇게 했을까. 성수 주일을 위해서였다. 토요일 자정마다 그러기를 두 달 후, 식당주인이 그를 불렀다. “이젠 우리 식당 그만두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식당 매니저 일을 맡아주게”라고 했다. 자신의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청년에게 신뢰를 보낸 것이다.

그 청년은 예배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죽고자 하는 그를 부활시켜 점점 상상도 못 할 큰일에 쓰셨다. 그는 미주 한인교회 역사에 큰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세계 선교에 다양한 영향력을 끼치고 영원한 나라로 가셨다.

그분의 이름은 장영춘 목사님이다. 예배에서 죽고 예배에서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 아셨던 그분은 필자가 섬기는 퀸즈장로교회 원로목사님이셨다. 그는 이 땅에 바른 예배를 남기고 영원한 예배의 나라로 떠나가셨다.

김성국 미국 퀸즈장로교회 목사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