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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배의 중심 십자가를 바라보라



예배의 중심엔 십자가가 있다. 이 땅에 수많은 예배가 있다. 하지만 십자가가 중심이 아닌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

예배에서 예수님의 위치는 정말 독특하다. 십자가를 지신 어린 양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시다.(계 7:10) 그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예배를 드리시는 대제사장이었고 동시에 예배의 희생제물이었다.(히 9:11~12)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예배를 드리는 분이고 예배의 제물까지 된다는 말이 상상이나 되는가. 이런 삼중(三重) 역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제사장, 곧 중보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피 흘리는 자가 찌른 자를 용서해달라는 중보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는 참소자들을 일거에 잠재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희생제물이심을 보이신다.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버림받은 제물은 하나님의 깊은 침묵 속에 천지를 진동케 한다.

십자가는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 대제사장의 십자가, 희생제물의 십자가로 놀라운 삼중 기독론이 담겨 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찬송의 주제가 된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대제사장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기도의 길을 연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처럼 대제사장의 인도하심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가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대면한다. 그리고 흡족한 은혜를 받아 나온다.

희생제물의 십자가는 예배 가운데 설교의 핵심이 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설교자의 절절한 외침은 십자가뿐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배의 중심에 오늘도 서 있다. 십자가 중심 예배에는 세속적인 타협이나 사람을 향한 아첨이 있을 수 없다. 예배에서 타협하는 것은 삶에서 백기를 드는 것과 다름없다. 예배에서 아첨은 모든 관계에서 비열한 자리로 내려가기로 작정한 것과 같다.

다윗은 그가 드리려는 예배에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다른 것을 놓으려는 유혹을 받았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던 이 일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냈고 징벌로 전염병이 퍼지면서 7만명이 죽었다.

전염병의 재앙이 마감될 때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했다. 장소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 아라우나는 예배의 제물을 값없이 제공하려 했다. 하지만 다윗은 덥석 그가 거저 주는 제물을 받아 예배드리지 않았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자기가 말한 대로 비싼 값을 치르고 마당과 희생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 이후 전염병이 완전히 그쳤다. 희생제물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예표한다.(삼하 24:1~25)

그리스도가 중심인 예배가 아니라면 다윗처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 주변엔 자기가 제안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라우나 같은 이들이 곳곳에 있다.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김성국 미국 퀸즈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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