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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헌 몸과 정든 몸



얼마 전 건강검진 차원에서 혈액 검사를 했는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꽤 높게 나왔다. 이 숫자는 해를 거듭하며 야금야금 상승 중이긴 했는데 이번에는 눈에 띄게 올라가 있었다. 정상 범위를 훌쩍 넘긴 수치에 의사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고 어디 혈압도 한번 재보자고 했다. 나는 “저는 평생 저혈압이었는걸요” 하며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혈압마저 내 예상 수치를 훌쩍 웃돌았다. 최종적으로 들은 소견은 이랬다. 작금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면 곧 치료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엄마 잔소리 버전으로 말하면 아마 ‘그 따위로 살면 낼모레 골병 난다’일 것이다.

식이조절, 운동 등으로 두어 달 관리해본 뒤 재검사하자는 말을 듣고 병원을 나섰다. 납덩이를 품고 나온 듯 마음이 묵직했다.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범위가 또 늘어난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20대부터 쭉 받아온 건강검진 결과지를 열어봤다. 정상, 정상, 정상으로 이어지던 숫자들은 언젠가부터 경계, 주의, 재검사 요망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백지로 남아 있던 의사의 소견 페이지도 언젠가부터 무엇무엇을 추적검사 하라는 안내로 채워지고 있었다. 얼굴에 기미가 늘 듯 몸 안에도 작은 혹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문득 이 세 글자가 떠올랐다. ‘다 됐다.’ 나의 육신이 이미 다 된 것 같았다. 낡은 집에서 녹물이 나오듯 이 몸엔 기름때로 눅진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낡은 자전거가 삐거덕거리듯 이 몸도 마디마디 허술해지고 있었다. 낡은 스웨터에 보풀이 뭉쳐지듯 이 몸에도 멍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몸은 더 이상 신품이 아니었다. 수십 년을 되는 대로 굴려온 끝에 중고장터 식으로 하면 ‘생활기스 있고요. 사용감 있습니다’로 묘사되는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때는 이 몸도 어제 유원지에서 사온 풍선 같이 팽팽하고 가볍게 떠다녔는데 이제는 다음 날의 풍선이 되고 말았다.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고 묵직해져서 바닥에 내려앉은 다음 날의 풍선 말이다.

낡은 것, 중고품, 헌것 같은 단어를 되뇌며 울적해하다 문득 대학 신입생 시절이 떠올랐다. 갓 대학에 입학한 우리들을 선배들은 새내기라고 불렀다. 산뜻하고 풋풋하고 그야말로 새것 같은 단어였다. 새내기 환영회 자리에서 한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얘들이 새내기면 우린 이제 헌내기야?” 그러자 다른 선배가 말했다. “아니지. 우린 정든내기지.” 정든내기라.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새것의 반대가 꼭 헌것이어야 하나. 정든 것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는 헌것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정든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의 육체를 되돌아봤다. 잡티와 주름들은 모두 내가 햇살을 즐겼던 흔적이었다. 뒤꿈치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마르고 굳어진 살들은 내가 열심히 걷고 쓴 기록이었다. 폭신하게 잡히는 허리둘레 살들은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저장해둔 것들이었다. 수십 년 간수해온 이 몸, 공들여 관리하지 않았음에도 어찌어찌 돌아가 준 이 기특한 몸.

물건은 낡으면 새것을 살 수 있다. 집이 낡으면 새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다. 하지만 육체만은 모두 1인 1기종씩 보급 받고 그 누구도 교환 및 반품할 수 없다. 우리는 어찌됐든 각자 획득한 몸을 추스르고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고지혈증 목전이라는 내 몸의 경고 신호를 일종의 팝업창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내 몸이 방탕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경고 창을 띄운 것이다. ‘위험, 지금처럼 살면 건강이 모두 소진됩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요’ 나는 깜짝 놀라 ‘아니요’를 눌렀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매일 1시간씩 걷거나 달리고 있다. 나가지 못하는 날에는 텔레비전에 홈트레이닝 영상을 틀어놓고 땀을 흘리며 따라한다. 배달음식을 끊었고 술과 고기도 대폭 줄였다. 제대로 관리해주지도 않은 주제에 낡았다고, 다 됐다고 팽개치자니 이 몸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수십 년 함께해온 이 정든 몸이 말이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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