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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텔레그램



러시아 특수부대가 집 현관 앞에 몰려왔다. 그들은 문을 부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형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보안이 투철한 메신저가 없을까. 그 순간 ‘텔레그램’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사업가 파벨 두로프(36)가 미국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보안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는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은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사정은 이렇다. 니콜라이-파벨 두로프 형제는 러시아판 페이스북 ‘브콘탁테(VK)’ 개발자. VK가 반 푸틴 시위대의 정보교환 창구가 되자 형제는 정부로부터 시위대의 개인정보를 제공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러시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던 이들은 결국 VK 지분을 매각하고 독일로 망명한다. 2013년 보안을 강점으로 하는 텔레그램을 만든다. 사용자들이 주고받은 모든 대화를 암호화해 제삼자가 감청하는 것을 막았다. 이곳의 비밀대화는 절대 뚫리지 않는다는 믿음. 이것이 사람들을 텔레그램으로 불러 모았다.

텔레그램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2014년이다. 박근혜정부 시절 사법 당국의 대대적인 사이버 검열 분위기 속에 정치적 의사 표현을 위한 사이버 망명지로 떠올랐다. 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이 당국의 감시를 피해 이곳으로 대거 이동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은밀함은 양날의 검. 한편으로는 악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보안성에 기대 숨을 수 있는 장소로도 악용됐다. 지난해 클럽 ‘버닝썬’ 사건 때 거론된 마약 ‘물뽕’도 텔레그램에서 공공연하게 거래됐다. 이번엔 성착취 불법 동영상이다.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n번방’도 텔레그램에 은밀하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범죄의 온상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요즘은 탈퇴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두로프 형제가 중시한 보안성은 마약과 음란물을 유통하는 자를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n번방의 철저한 수사를 위해서는 텔레그램의 협조가 필수다. 악성 범죄자들의 프라이버시까지 지켜줄 필요는 없다.

한승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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