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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카를로스 곤과 한국 언론



일본 아이돌 그룹 아라시의 마쓰모토 준이 출연한 드라마 ‘99.9-형사전문변호사’는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드라마 제목에 나오는 99.9는 일본 형사재판의 유죄 판결률인 99.9%를 의미한다. 이 드라마는 2016년 시즌 I의 인기에 힘입어 2018년 시즌 II가 만들어졌다.

마쓰모토가 연기하는 변호사 미야마 히로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살인범의 누명을 쓴 채 감옥에서 죽는 아픔을 겪었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고 싶었던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진범을 찾아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난 데다 아버지와 진범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재심을 통해 번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미야마에게 사건을 의뢰한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0.1%의 확률인 무죄를 얻어낸다. 드라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꿈 같은 이야기다.

‘99.9-형사전문변호사’보다 훨씬 먼저 일본 형사사법제도의 실상을 고발한 영화가 나온 바 있다. 영화 ‘셸 위 댄스’ 등을 만든 유명 감독 스오 마사유키가 2007년 선보인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다. 그는 2002년 지하철에서 치한으로 붙잡혀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던 남성이 2심에서 누명을 벗고 승소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일본의 형사사법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스오 감독은 이후 취재를 통해 일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명을 쓴 채 유죄 판결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2005년 전철에서 치한으로 몰려 유죄 판결을 받은 남성의 이야기는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줬다. 이 남성은 1심에서 징역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최고재판소(대법원)까지 갔지만 그의 상고는 기각됐다.

영화 속에서 면접시험을 보러 가던 가네코 뎃페이는 만원 전철에서 여중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돼 경찰 조사를 받는다. 결백을 주장하지만 경찰은 자백하라고 윽박지르기만 한다. 국선 변호사 역시 피해자와 합의하고 자백하는 게 낫다고 충고한다. 유죄를 인정하면 벌금형 정도만 받고 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는데, 억울했던 그는 혐의를 부인한다. 검찰로 넘어가서도 역시 무죄를 주장하지만 인정받지 못한 채 기소된다. 그를 믿어준 몇몇 변호사가 나서줬으나 12번의 공판 끝에 결국 유죄가 선고된다.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중얼거린다.

스오 감독이 일본의 형사사법제도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인질사법’이었다. 일본 수사 당국은 용의자를 유죄로 간주해 구속수사 하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검찰은 기소 전 용의자를 48시간 동안 잡아 가둘 수 있으며, 이 기간에는 변호인 입회 없이 심문이 진행된다. 이후에도 최장 23일까지 용의자를 구금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 형사소송법 60조는 특별한 이유 없이도 구속기간이 1개월마다 갱신되도록 하고 있다.

일본 수사 당국은 이런 손쉬운 구속과 압박 심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유도하고, 구속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혐의를 추가하는 방식에 의존해 왔다. 피의자들의 자백 비율이 85%를 넘지만 허위 자백인 경우가 적지 않다. 형사사법제도에서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죄 없는 한 사람을 벌하지 말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무시되어 온 셈이다. 최근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회장의 영화 같은 도주극 이후 일본 형사사법제도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곤 전 회장이 레바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일본 탈출 이유로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일본 형사사법제도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곤 전 회장의 탈주와 관련해 일본 형사사법제도를 비판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의 형사사법제도 역시 후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수사 중계 보도와 재판 이전에 이미 피의자를 단죄하는 한국 언론도 일본을 비판하기엔 부끄러운 처지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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