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돋을새김] 정치하는 엄마들의 승리



매달 70만~80만원씩 유치원비를 냈는데 아이의 간식은 겨우 포도 두 알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유치원장이 원비를 개인적으로 쓰고 명품가방도 샀다고 했다. 국무조정실이 이런 비리 유치원을 적발했지만 가장 중요한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다. 분노한 엄마들은 행동했다. 명단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행정소송에 나섰다. 개인으로는 우리 애가 밉보일까 봐 불안한 학부모였지만, 뭉치니 정치권이 눈치를 보는 힘이 되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였던 일이 현실화됐다. 명단은 공개됐고, 마침내 유치원이 정부 지원금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한 법안이 통과됐다. 지난 13일 국회에서 통과된 ‘유치원 3법’(사립학교법 유아교육법 학교급식법 개정안) 이야기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이 법안을 발의한 지 무려 448일 만이다. 빠르게 처리된다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올라탔으나 안건 순서는 맨 꼴찌였다. 아이들을 위한 민생법안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공직선거법, 검찰개혁법 등이 다 통과되어야 상정될 수 있는 운명에 놓여 있었던 거다. 그러니 다른 법안으로 정치권이 싸우고, 본회의가 열릴 듯하다 무산되는 동안 엄마들은 몹시 화가 났었다.

박 의원의 국정감사 폭로로 촉발됐지만 이 법안 통과의 배경에는 비영리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있었다. 여기서 ‘엄마’란 생물학적인 엄마뿐 아니라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 모든 양육 주체를 아우르는 사회적 모성을 말한다. 정치하는 엄마들이 이 일을 해낸 원동력은 절실함이다. 왜 내 아이가 체험활동 가는 농장이 허가도 안 받은 곳이고, 급식에 나오는 채소는 시들시들하고, 필수 교구는 턱없이 부족한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사학이 결탁해 명단 공개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버티는 동안, 어디가 비리 유치원인지 모르는 엄마들은 유명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으니 말이다.

엄마 한 명으로는 안 됐을 일이다. 유치원 3법뿐이 아니다. 우리는 최근 엄마 아빠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 눈물로 호소하고 분노하던 모습을 자주 봐 왔다. 어린이생명안전법 ‘민식이법’ ‘하준이법’ 등도 그렇다. 평범한 엄마 아빠이자 힘없는 시민이던 이들은 왜 스쿨존에 신호등을 달고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해 달라는 법안이 정쟁의 파도 속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는지 화가 났다. 멀리서 정치권을 바라볼 땐 몰랐는데 막상 내 일로 닥쳐보니 꽉 막힌 벽을 체감했다. 이들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도 위험한 어린이 안전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을 부모들이 눈물로 호소해야 해결되는 나라, 이게 한국 정치의 자화상이다. 부모들은 이런 법안이 통과되지 않는 나라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라에선 더 이상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실함이 사회를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하는 엄마들처럼 ‘정치하는 ○○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 장하나씨는 “○○들이 모두 정치를 할 때 비로소 정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고 내 삶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안 처리가 폭풍처럼 지나간 후 우리는 바로 총선 국면을 맞았다. 선거철엔 한 표 달라고 고개를 숙이다가 막상 실생활과 관련된 법을 고쳐 달라고 호소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는 그런 국회의원을 뽑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와 함께한 의원들의 이름을 기억해둘 일이다. 그래서 다음 선거에서 소신대로 표로 행사해야 한다. 반대로 국민들이 아무리 호소해도 민생법안과 경제법안을 등한시한 의원들은 표로 심판해야 한다. 투표는 가장 평범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정치 행동이다. 국민이 무섭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 앞으로 세 달 정도 남은 총선, 정치인이 정치꾼처럼 느껴져 싫어질수록 우리는 정치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sjha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