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1100주년, 고려를 돌아보다] “세계가 환호한 고려청자·나전칠기… 문화 한류 원조는 고려”

고려는 개방적인 태도로 중국과 거란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 ‘청출어람’의 역수출 문화상품을 만들었다. 상감청자와 나전칠기, 고려지 등이 그 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1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에서 이를 증거하는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상감청자 전시 전경과 ‘청자물가무늬판’, ‘나전국화넝쿨무늬경함’, 전통 한지(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김지훈 기자,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제공
 
비색청자의 대표작 ‘청자사자장식향로’
 
박종기 국민대 명예교수. 김지훈 기자


2000년대 동남아를 감동시킨 드라마 ‘대장금’부터 최근 팝의 제국 미국을 강타한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까지, 세계를 열광시키는 한류는 우리를 우쭐거리게 만드는 문화 수출품이다. 그런데 고려야말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났던 문화강국이었다. 고려청자 나전칠기 고려지(高麗紙) 대장경 등 제조업에 기반을 둔 고려의 문화 수출품에 중국에서 베트남, 필리핀까지 동아시아가 환호했다. 무엇이 문화 수출 강국 고려를 탄생시켰는지, 고려의 사회적인 저력과 함께 고려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갖는 함의를 들어보려 박종기(67) 국민대 명예교수를 최근 서울 중구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준비위원장인 박 교수는 한국중세사학회장을 지낸 바 있으며 ‘고려시대의 재발견’(2015), ‘고려의 부곡인, <경계인>으로 살다’(2012) 등 저술을 통해 대중과도 적극적으로 만나고 있다.

-고려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형성된 다원적 국제질서의 최대 수혜자였다는데.

“당나라가 멸망한 뒤 혼돈의 시대가 걷히고 10세기 중반 송-거란-고려를 중심축으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또 중국 대륙의 한편에서는 송-거란-서하, 송-서하-토번이 각각 각축을 벌이는 다원적 국제질서가 형성된다. 당 제국과 같은 강력한 중심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다중심성 세계였다. 고려 왕조는 이 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영토를 확장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며 왕조의 모습을 일신시켰다. 하지만 개방이라는 키워드가 없었다면 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개방의 정도를 수치로 보자면.

“수도 개성 인근의 국제무역항인 벽란도에는 외국인 상인이 넘쳐났다. 송나라, 후주 등 이른바 5대 10국 출신과 거란인, 여진족 등 고려 전기에 귀화한 외국인 인구만 17만명이었다. 12세기 무렵의 고려 인구가 200만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8.5%에 해당하는 놀라운 수치다. 고려에 와서 재상이 된 외국인만 10여명이었다.”

-그런 개방정책에 의해 탄생한 것이 청자와 나전칠기, 고려종이 등이었다고 들었다.

“고려왕조는 동아시아 제국과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자국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비색청자는 5대 시대의 오월국이 망한 뒤 월주요(越州窯) 기술을 받아들여 송나라 수준을 따라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상감청자는 송나라에는 없는 독자적인 우리 기술로 개발했다. 비색청자에서 상감청자 단계로 넘어갈 때는 거란에서 수입한 금속기술인 은입사·금입사(금과 은을 잘게 잘라 실처럼 꼬아서 테두리를 두르는 기술)를 도자기에 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전칠기도 이 기술을 응용해 만든 것이다. 모두 동아시아 제국에 수출된 주요 문화상품이었다. 이뿐 아니다. 983년 송나라에서 제작한 최초의 대장경을 입수한 고려는 불과 한세대 만인 1011년 초조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대장경 제작은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지식인 경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인쇄술의 발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대고려-그 찬란한 도전’전에서 이런 고려의 주요 문화 수출 상품을 볼 수 있다. 특히 고려 나전칠기는 전 세계적으로 13점 정도만 남아있는데, 국내에는 2~3점뿐이다. 이번 전시에는 영국 대영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나전칠기가 나왔다.

-한지라고 하면 전주한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명성이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가나.

“고려 종이인 고려지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북송의 저명한 문인이자 서화가인 황정견, 소동파 등이 극찬해 마지않았다. 고려는 두드리는 기술인 도침법을 써서 종이의 밀도를 높였기 때문에 종이가 굉장히 매끄럽고 먹물이 번지지 않았다. 그러니 ‘고려의 종이는 은처럼 빛나네’라는 극찬을 들었던 것이다. 닥나무가 자생하는 전국에서 만들었지만 특히 전주와 남원이 유명했다.”

-청자나 종이, 나전칠기 등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대내적인 사회적 시스템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다. 교과서에 천민지역으로 잘못 알려진 향소부곡의 ‘소(所)’제도가 그런 인프라 역할을 했다. 고려 때는 소금 전문 염소, 생선 전문 어량소, 미역 전문 곽소, 종이 전문 지소, 자기 전문 자기소 등 수공업 제품을 만드는 특수한 소 시스템이 전국에 200~300곳이나 됐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고급문화를 만들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로 가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고려가 문화제품을 수출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나.

“한번 생각해보라. 그때는 동아시아가 곧 세계였다. 동아시아에서 호평받은 제품이 고려 이전의 삼국시대나 혹은 조선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려는 이렇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명품을 많이 만들었다. 지금의 스마트폰과 자동차처럼 고려의 문화 제품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고려시대에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개방성의 사례를 더 꼽자면.

“고려는 외국의 인재도 적극 채용했지만, 중국에 우리 유학생을 많이 보내기도 했다. 기술 수입뿐 아니라 유학생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로 유명한 김부식 집안은 형제 5명 중 4명이 송나라에 유학해 그 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에 합격했다. 송에서 관료로 등용돼 일하고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왕조가 교체된 원나라 때도 이색, 안향 등이 그렇게 유학을 했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해금(海禁·해상무역 금지)정책 탓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당·송이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한민국도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으니 고려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냉전체제였던 1950년대에는 글로벌화하고 싶어도 할 수 있었겠나.”

-당시 지식인들의 고려 문명에 대한 자부심도 아주 높았다고 하는데.

“문인 이규보는 ‘삼한(고려)은 작은 땅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중국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된 나라였다. 인재가 있으면 나라요, 인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다’라고 자부했다. 이규보와 시로 쌍벽을 이뤘던 진화는 금나라 사신으로 가는 도중 지은 시에서 ‘중국(송나라)은 이미 노쇠했고, 북방 민족(거란과 여진)은 몽매한 상태에 있다. 새로운 문명의 아침이 동쪽(고려)에서 온다’고 했다. 송나라와 거란이 당시 국제질서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는 스스로 천자(황제)국을 지향했다. 우리뿐 아니었다.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문화 수준을 높이 평가해 중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며 ‘소중화(小中華)’라고 칭했다. 조선시대에 명-청 교체 이후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계층에서 오랑캐족인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을 소중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사대적인 관점에서 소중화라고 부른 것이다. 고려의 소중화 사상은 중국이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고려 왕조를 동아시아의 문화 강국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현재 한국이 세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고려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왜 고려가 중요한가.

“지금의 한반도 정세 역시 다원적인 국제질서 하에 놓여있다. 한반도의 운명을 남북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함께 결정하는 6자회담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지 않나. 고려가 가지는 다원성 개방성 역동성, 그리고 통합과 화해의 정신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적어도 고려가 단일민족이었다는 인식은 재고가 필요하다. 다원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난민 문제, 이주민 등에 대해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산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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