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광주의 피를 ‘민주주의의 꽃’으로 승화시키다


 
문재인(오른쪽 두 번째) 대통령이 지난해 5월 18일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정세균 당시 국회의장(맨 오른쪽),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왼쪽에서 두 번째), 피우진 국가보훈처장(맨 왼쪽)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뉴시스
 
곡의 작곡자인 김종률 사무처장이 소장하고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 김종률 사무처장 제공


1950년대 한국의 현대사는 첫머리에 터진 6·25에 의해 규정됐다. 60년대 또한 연이어 일어난 4·19와 5·16으로 상징된다면 70년대는 전태일의 외침으로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도 다르지 않았다. 80년대 아니, 그 후 몇 십 년을 더 영향을 미칠 비극적인 사건이 80년에 일어났고, 이 사건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5·18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광주’는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질문들은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각별한 의미를 띤다.

‘아침이슬’을 잇는 또 하나의 성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의 군부 쿠데타가 있었지만 이들의 총구가 시민을 향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80년 5월 21일, 광주 시내 각 대학에 진주한 계엄군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발포했고, 그렇게 당시 정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그날 오후 광주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광주를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시켰다. 그리고 27일 새벽엔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해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을 사살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향한 거대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12·12 쿠데타와 5·18 무력 진압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집단과 이들의 권력에 굴복한 보수 세력들은 5·18의 정신을 왜곡하고 광주의 시민들을 폭도로 몰았으며 5·18의 투쟁을 북한 공작원의 음모로 몰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영원히 가릴 수는 없었다. 5·18 정신을 계승하는 민주주의의 대장정은 80년대를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전개됐으며, 87년 6월 시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시민의 힘으로 쟁취하는 거대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아울러 이듬해엔 5·18 진실 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시작돼 학살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5·18은 이제 대한민국 지방 어느 도시에서 일어났다가 잊힌 하나의 시위가 아니다. ‘5·18’ 혹은 ‘광주’라는 단어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권력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권을 의미하는 세계사적 상징이 됐다. 이 역사적 상징을 가장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하나의 노래가 광주의 비극 직후에 탄생했으니, 바로 오늘날 진보진영의 거의 모든 집회에서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원곡의 악보는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되어 있지만 맞춤법상 ‘님’을 ‘임’으로 고쳐 쓰게 됐다).

이 노래의 숨은 주인공인 윤상원은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산화한 광주의 청년이다. 그는 전남대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권유로 들불야학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박기순은 78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먼저 떠난다(그의 장례식에선 소설가 황석영이 조사를 읽고 김민기가 ‘상록수’를 불렀다고 한다).

침묵만이 강요되던 81년, 황석영은 작곡가 김종률을 비롯한 광주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윤상원과 박기순을 기리는 영혼결혼식을 열기로, 그리고 결혼식에서 노래극 ‘넋풀이’를 선보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82년 2월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넋풀이’가 첫선을 보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 노래극의 말미를 장식한 합창곡이었다.

모든 것이 영원히 봉인될 것만 같던 이때만 하더라도 이 노래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세계적인 노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 노래는 불법 테이프로, 필사한 악보로, 새벽을 밝히는 햇살처럼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80년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됐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성가가 탄생한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시대의 숨결이 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통일운동가 백기완이 80년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일부를 차용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쓰고, 전남대 출신 통기타 뮤지션이던 김종률이 멜로디를 만든 곡이다. 김종률은 누구던가. 그는 전남대 재학 시절이던 79년 로컬 가요제인 전일가요제에서 ‘소나기’로 대상을 받고 그해 말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도 했었다. 그는 광주 대학가를 대표하던 아마추어 가객이었고 순수한 문학청년이었다. 하지만 5월의 비극은 이 감수성 예민한 청년에게 장엄하고 격렬한 영감을 제공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수많은 투쟁가의 전통을 이어받은 4박자의 전형적인 행진곡이다. 그러나 이 곡은 단조의 구성을 띠고 있다. 군가를 위시한 거개의 행진곡은 밝고 미래지향적인 장조로 이뤄져 있지만 이 노래는 행진곡의 투쟁성을 근간에 깔면서도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품고 있다. 나아가 그 슬픔을 극복하고자 하는 거대한 의지를 음표로 형상화한다. 이 노래는 그저 한 작곡가의 솜씨가 아니라 수많은 주검을 딛고 만들어진 시대의 숨결이다.

70년대와 80년대엔 수많은 민중가요가 탄생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노래는 시대와 함께 잊혀졌다. 이 노래가 유독 시대와 세대, 지역과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저력은 바로 이 노래가 지닌 단순하고도 강인한 설득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작사가는 아니었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이 매만진 노랫말의 응축성 또한 남다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운을 떼는 도입부나,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으로 잇는 두 번째 테마, 무엇보다 해일처럼 감정이 용솟음치는 후렴부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이렇듯 영혼의 울림을 담은 노랫말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김종률의 선율과 리듬은 일란성 쌍생아처럼 입에 착착 들어맞는다.

우리가 이 노래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이 곡이 대한민국 민중만의 노래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노래는 전 세계의 소외되고 핍박받는 이들의 노래로 불리기 시작했다.

태국의 민주주의 시위에서 이 노래는 태국어로 불린다. 중국이나 홍콩, 대만에서도, 일본의 시위에서도 이 노래는 그 나라말로 번안돼 불리곤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K팝이 세계를 정복하기 한참 전부터 10개가 넘는 언어로 불린 한류의 원조였다. 5·18이 어떤 사건인지 모르는 세계의 민중에게도 이 노래가 지니는 진실함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날아가 꽂힌 셈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이 노래는 숱한 상처를 입었다. 박근혜정부 시절엔 5·18 기념식에서조차 부를 기회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야말로 우리가 만들고 세계인들이 같이 부르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국가를 제정한다면(애국가는 공식 국가로 채택된 적이 없다), 나는 이 노래야말로 국가가 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노래라고 믿는다. 물론 아직도 이 노래를 그저 ‘빨갱이’의 노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극력 저지하겠지만, 언제까지 우린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한 자가 만든 것으로 의심되는 노래를 국가로 부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마음을 다잡을 것인가.

이 노래는 솔로로 불러도 좋고 합창으로 불러도 좋은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가 만들어진 지 37년이 됐는데도 아직 결정적인 연주 버전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좀 더 수준 높은 편곡과 반주로 이 곡이 녹음됐으면 좋겠다.

아직 ‘결정판’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시도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울러 5·18의 노래가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광주는 죽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정신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을 위협하는 폭력이 여전히 준동하는 한.

<강헌 음악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