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정치적 암흑기 속 음악청년이 읊조린 자유의 복화술


 
밴드 산울림 멤버들이 1997년 1월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창완(보컬·기타) 김창훈(베이스) 김창익(드럼). 삼형제 가운데 막내인 김창익은 2008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국민일보DB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인해 조성된 계엄령 국면은 이듬해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바로 트로트라는 이름의 ‘왕정복고’가 전격적으로 단행된 것이다. 7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의 근간을 담당했던 트로트의 위세는 통기타 음악과 로큰롤, 그리고 팝 계열의 음악에 밀려 급격히 퇴조하고 있었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드라마 주제가를 부르는 가수로 후퇴했고, 그의 후계자로 꼽히던 조미미도 어제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송사들이 열렬히 지지하던 하춘화만이 고군분투하는 형국이었다.

무엇보다 60년대 말부터 트로트의 영광을 몰고 온 남성 트로트 트로이카, 남진-나훈아-배호의 위력이 급격히 무너졌다. 남진은 ‘님과 함께’ 이후 팝 스타일로 귀순해 트로트 가수로서의 정체성이 사그라졌다. 나훈아는 배우 김지미와의 세기의 결혼 이후 칩거에 들어갔다. 배호는 7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고작 27세. 한국 트로트사의 가장 안타까운 손실이었을 것이다. 신예 후계자로 지목된 김상진과 박일남은 바로 앞의 선배들이 호령했던 중원을 다시 되찾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다.

청년문화의 새로운 아이콘

계엄령의 엄혹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75년의 가요 규제 조치와 대마초 파동은 청년문화의 스타들을 모조리 퇴출시켰다. 살아남은 생존자는 송창식과 김세환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서 76년을 새로운 지형도로 몰고 가는 노래가 등장했으니 놀랍게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트로트 텍스트에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덧입힌, 일종의 혼성 트로트 팝 넘버였다.

주인공은 트로트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언더그라운드 록밴드 그림자의 리더 조용필. 그는 무명시절인 72년 통기타 음악 스타일로 이 노래를 이미 녹음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그는 간신히 음반 취입의 기회를 얻자 이 반쪽짜리 음반(LP 한 면만 조용필의 노래였고 나머지 반은 영사운드라는 그룹이 차지한 스플릿 앨범이었다)의 여백에 밤거리 유행가 스타일로 편곡한 이 노래를 넣었다.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녹음하는 걸 마뜩잖게 여겼지만 무명이었던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동포의 모국 방문이라는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이 노래는 밀리언셀러에 이르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무수한 클론들을 낳았다. 통기타와 장발이 사라진 브라운관에는 점점 생존이 어려워진 청년문화 무명의 영웅들이 순화된 복장을 하고 트로트를 부르며 귀순하고 있었다. 검은 나비의 보컬 최헌이 곧 가수왕에 오를 것이며 솜사탕의 보컬 윤수일은 트로트의 젊은 신성으로 떠오를 예정이었다. 메신저스의 조경수가 차트 정상에 올라 꽃다발 세례를 받고 트리퍼스의 김훈이 아이돌에 가까운 트로트의 기수로 거듭나기 직전이었다. 트로트가 만든 왕정복고는 창의적인 측면과 예술적 완성도의 측면에서 한국 대중음악을 일순간에 후퇴시켰다.

하지만 이미 활주로를 이륙한 청년문화는 산울림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예 삼형제 밴드의 등장으로 그 저력을 단숨에 증명한다. 신중현과 산울림이라는 70년대의 대조적인 두 아이콘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 록의 정체성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게 해준다.

소년 노동자 신중현이 ‘재키 신’이라는 애칭을 얻으면서 미8군 무대에서 로큰롤과 솔, 사이키델릭의 문법을 습득하며 변방의 독자성을 증명한 결과물이 74년 발표된 신중현과 엽전들의 앨범이라면, ‘서울대’(막내인 드러머 김창익은 고려대)라는 대표적인 기득권 집단에서 발아한 산울림의 음악은 김창완의 표현대로 ‘(서구 문화의 카피 경향에 대한) 자존심’에 근거를 두고 있는 70년대 캠퍼스 청년문화의 엘리트주의였다.

산울림 삼형제는 캠퍼스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70년대 한국 록의 교두보였던 무교동 야간업소를 종횡무진했던 ‘작은 거인’ 김수철과는 달랐다. 산울림은 음악이 부차적인 요소로 전락하는 공간이라고 간주해 나이트클럽 무대엔 서지 않았다. 따라서 사랑과 평화로 대표되던 당시의 전업 록 뮤지션 진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젊은 한국 음악’의 출현

이렇게 산울림의 록에 대한 접근 방식은 미8군과 야간업소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프로페셔널 뮤지션 진영과는 전혀 다른, 아마추어리즘의 영토에서 이뤄진, 그야말로 평지돌출의 ‘서프라이즈’였다. 75년 긴급조치의 파시즘이 모던 포크와 록에 재갈을 물려 쑥대밭을 만들고, 그룹사운드 출신 뮤지션에게 상업적 성공을 미끼로 복고로의 퇴행을 강요할 때, 산울림의 데뷔 음반은 ‘젊은 한국 음악’에 갈급해하던 신세대에게 하나의 구원이 됐다.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문 좀 열어줘’ 같은 넘버들이 탑재된 신선한 음반은 밴드의 맏형인 김창완이 졸업과 취직을 목전에 두고 집안에서 벌여 오던 청춘의 음악 파티를 마감하는 일종의 ‘기념품’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였던 통기타 음악이 아니라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록 밴드 형태를 선택했다. 신중현의 음악이 서구 음악을 향한 정면 돌파, 혹은 우회의 산물이었다면 산울림의 음반은 달랐다. 이들의 음악은 서구의 록 음악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자유주의자들이 선택한 유희의 연금술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이 삼형제 청년들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에는 시대의 우울이 묻어 있었다. 김창완과 김창훈(둘째인 그는 베이스 주자이며 형과 같은 서울 농대생이고, 농대의 밴드 샌드페블즈가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거둔 그랑프리 곡 ‘나 어떡해’의 작곡자다)은 학교 공부보다는 밴드라는 탈출구 속으로 숨은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 이들은 75년 4월 그들의 농대 교정에서 선배 복학생 김상진이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천명하며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부르짖으며 할복자살한 충격을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후속 시위를 불러와 서울대 총장이 사임하고 치안본부장까지 경질되는 파장을 일으켰다는 것도 알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서지 못했던 이들에겐 골방의 록 음악만이 살아있음을 확인케 하는 증표였다.

산울림의 음악이 시대를 넘어 새로운 수용자 세대에 의해 재해석되고 호명되는 것은 이 같은 숨 막히는 슬픔과 절망감 속에서 피어난 원초적인 자유와 독립의 무의식 때문이리라.

이 아마추어들의 반란은 ‘명문대생에’ 의한 일회성 센세이셔널리즘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70년대 후반 암흑기에 ‘문화적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80년대 전반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히는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음악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이었다. 산울림의 기나긴 연대기에서 특히 빛나는 초기의 세 앨범과 둘째와 셋째 앨범 사이의 보너스 격인 첫 번째 동요 앨범 ‘개구쟁이’가 1년 사이에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온 것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들은 ‘히트곡’ 중심이 아닌 ‘앨범’이 중심이 되는 룰을 발전시켰다. 한국 라이브 역사에서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문화체육관의 단독 콘서트도 성공적으로 열었다.

산울림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데뷔 앨범의 무지막지한 성공은 이들의 표현 영역을 더욱 확장시켰다. 3분 25초 동안이나 진행되는 두 번째 앨범의 머릿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인트로는 충격적이었다. 세 번째 앨범을 열어젖힌 ‘내 마음’(원제는 ‘황무지’였으나 검열 탓에 수정됐다)에서의 김창훈의 위악적인 메탈 창법과 뒷면 전체를 단 한 곡으로 채운 ‘그대는 이미 나’의 자유분방한 장르 실험은 한국 록 음악의 새로운 분수령이었다.

한국 록의 영감의 원천은 김민기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어의 울림이나 그 속에 내재된 리듬감을 집요하게 형상화하려는 데 있다. 산울림의 함장 격인 김창완은 30년대 이래 한국 대중음악의 형식이었던 2박자 단위의 4음보 율격이나, 한국전쟁 이후 서구 음악의 강박 관념 속에 거의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진 4박자 8비트의 규칙에 구금당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들은 형제였기에 이해관계에 따라 밴드 구성원이 이합집산하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삼형제의 독특한 하모니는 각 파트의 연주 테크닉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이완된 베이스 인트로는 블루스 스케일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평조 조성에 가깝다. 이와 같은 나른한 사이키델릭적인 해체는 이미 데뷔 앨범의 문제작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들 소심한 엘리트 청년들은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사운드만으로 초월적인 현실도피를 음악적으로 감행했다.

이 여정엔 온갖 억압의 표정들과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우울한 반항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길고 긴 혼돈의 서주가 끝나면 주술적인 김창완의 수사학이 안개비처럼 내려온다. 그곳은 그들이 서울 흑석동 방구석에서 그린,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 그들만의 초라한 유토피아였다.

이 초라한 유토피아는 수십, 수백만의 상처 입은 청년과 소년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이 형제들의 노래와 함께 어두운 청춘의 터널을 통과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아무런 관심도 없이 다시 임기 6년의 대통령에 선출되고, 최소한의 노동권을 요구한 동일방직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뒤집어썼던 78년의 일이었다. 가장 주류적인 비주류였고, 가장 비주류적인 주류였던 산울림의 이 노래는 생물학적인 연령과 상관없는, 영원한 젊음에 바치는 상처 입은 기록일 것이다.

강헌<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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