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⑬·끝)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下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대를 이어 한국선교에 앞장선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선교사의 추모비와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묘비. 강민석 선임기자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가의 묘비. 강민석 선임기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선교사 90명, 선교사 가족 55명이 안장돼 있다(위 사진). 셔우드 홀 선교사의 공적비 앞에서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이 자신의 저서 ‘양화진 순례길’을 소개하고 있다(아래 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한국선교에 앞장선 대표적인 선교사 가문의 묘가 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홀 선교사 가문이 대표적이다.

아펜젤러 아들딸의 조선 선교

선교사묘원에는 배재학당을 창설하고 한국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63∼1902) 선교사 기념비, 아들인 헨리 도지 아펜젤러(1889∼1953) 부부 묘,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1885∼1950)의 묘가 있다.

교육, 출판, 성경번역의 선구자인 아펜젤러 선교사의 뜻을 이어받아 아들딸도 교육선교사로 헌신했다. 아들 헨리 선교사는 1920년부터 20년간 아버지가 설립한 배재학당 교장으로 헌신했다.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강조해 한때 일제로부터 교장 인가를 취소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1953년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자 미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임종 전 “나를 한국 땅에 묻어주고 아버지께서 조선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이듬해 10월 한국에 안장됐다.

딸 엘리스 선교사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선교사 자녀다. 군산 앞바다에서 부친이 선박사고로 순직할 때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인재 육성에 주력했던 그녀는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교장으로 일했다. 1950년 채플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설교를 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져 순직했다. 각 사회단체 대표들은 그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예배를 드렸다.

감리회보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평소에) 자기는 죽어 한국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몇 해 후면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자기의 참 고향인 한국 땅에 뼈가 묻히지 못할 것을 슬퍼하여 늘 가슴을 졸였다. 예상보다 그의 떠남이 좀 빠른 듯하나 그의 유해는 그가 사랑하는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 땅에 묻히게 되었으니 그의 소원은 이루어진 듯하다.”(감리회보 1950년 2월 25일자)

4대를 이은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

양화진에는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 부부 등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안식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부활절에 26세의 나이로 조선에 들어왔다. 8세 연상의 의료선교사 릴리어스 호튼(1851∼1921)과 결혼했으며,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다녀올 정도로 선교 열정이 컸다.

그는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아 성경번역 사업을 진행했다. 최초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경신중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 근대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언더우드는 1916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5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미국에 안장됐던 그의 유해는 1999년 양화진으로 옮겨져 아내와 합장됐다.

언더우드 2세인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원한경·1890∼1951). 그 또한 부친의 뒤를 이어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으로 학교 발전에 기여했다. 해방 후 혼란기였던 1949년 아내가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는 아픔을 겪었다. 미국으로 갔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심장병이 악화돼 아내 곁에 묻혔다.

언더우드 3세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원일한·1917∼2004)도 연세대 총장 등을 지내며 교육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군인으로 자원했고 정전회담 실무자로 참여했다. 2004년 77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부모와 부모, 아내가 잠든 양화진에 묻혔다. 언더우드 가족을 추모하는 기념비엔 이런 글이 있다. “후손들도 대를 이어 한결같이 이 겨레와 교회를 위해 이 땅에서 그들의 생애를 바쳐오고 있다.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남편·딸 잃고도 선교 매진한 여인

2대에 걸쳐 4명의 선교사가 모두 의료선교사로 헌신했던 홀 가족의 합장묘도 있다. 1894년 당시 29세였던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 선교사는 두 살배기 아들 셔우드 홀(1893∼1991)과 배 속에 딸 에디스가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남편 윌리엄 홀(1860∼1894)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고통을 당한다.

남편을 잃은 로제타는 이런 글을 남겼다.

“가련한 셔우드! 지난달 너에게 엄청난 슬픔이 닥쳤구나… 11월 24일 토요일 해질 무렵, 아빠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을 안고, 어린 아들과 복중에 있는 또 하나의 아기를 위해 용감하고 강해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1894년 12월 10일 육아일기 중)

고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복녀로 1895년 태어난 딸 에디스도 3년 만에 하늘나라로 떠난다. 하지만 이런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1933년까지 의료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녀는 4권의 일기와 2권의 육아일기를 남겼는데, 그 속엔 고난 속에서도 조선 백성을 위해 헌신했던 여선교사의 삶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로제타는 1951년 뉴저지에서 별세했다. 어머니의 헌신을 본받은 셔우드 홀은 결핵 퇴치에 앞장선다. 홀 가문 4명의 한국 선교사역 기간을 합치면 79년이나 된다.

당신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많은 사람이 길을 걷는다. 사람들은 보통 길을 걷는 것을 인생에 비유한다. 인생길을 가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길에 나섰다. 그 길에서 이교도들의 위협, 동족의 홀대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다. 그 기록이 사도행전이다.

130년 전 조선에 온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교사들과 그 가족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 본국에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길을 따라 끊임없이 조선으로 왔다. 아니 대를 이어왔다. 요즘 같으면 위험지역, 여행제한지역이라며 애써 꺼려했을 땅이 조선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꺼이 희생하며 횃불이 되어 찾아왔다.

복음은 이렇게 해서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들의 선교사역은 조선의 사도행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 가운데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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