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⑪ 안산 최용신기념관

경기도 안산 상록구에 있는 최용신기념관 전경.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한옥 형태로 2007년 건립된 기념관에는 샘골강습소 시절 사용했던 악보와 교재, 심훈의 ‘상록수’ 초판 등이 있다. 안산=강민석 선임기자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이 최용신의 부조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산=강민석 선임기자
 
공원으로 조성된 최용신기념관 한쪽엔 최용신의 묘(위 사진 왼쪽)와 약혼남 김학준 장로의 묘가 나란히 있다. 1975년 소천한 김 장로는 죽기 전에 “최용신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래 사진 오른쪽 책은 기념관 안에 전시된 심훈의 소설 ‘상록수’ 초판본.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채영신은 최용신을 모티브로 했다. 안산=강민석 선임기자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을 나와 이틀 만에 안산에 도착했다. 안산시 상록구 명칭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교 시절 이 소설을 처음 접하고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다.

소설은 화성군 반월면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요절한 최용신(1909∼1935)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평안도 서북지방에서 서구 문물을 일찍부터 수용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조부는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앞장섰고, 부친은 미국 의원 한국방문단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달하려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신간회 활동도 했다고 한다.

기독교에 바탕을 둔 ‘상록수’ 정신

안산 상록구 샘골서길 최용신기념관에 들어섰다. 1종 전문박물관으로 2007년 최용신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지하 1층, 지상 1층의 한옥 형태로 건축됐다. 옛날 샘골강습소의 모형과 당시 사용하던 악보와 교재, 심훈의 ‘상록수’ 초판 등을 볼 수 있다.

최용신은 1928년 원산 루시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다. 농촌 봉사활동을 통해 가난과 무지가 만연한 농촌 현실을 깨닫고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 샘골에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교사로 파견돼 농촌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최용신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낮춰 어린아이들과 함께 놀고 부녀자들과 더불어 일하면서 그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마을 주민들은 처음에 최용신을 무시했지만 그의 뜻을 이해하면서 점점 변해갔다.

샘골강습소에선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가 모두 학생이었다. 최용신은 직접 교재를 만들어 한글과 산술, 체조, 음악, 성경, 재봉 등을 가르쳤다. 수업 후에는 가정을 방문하면서 학부모와 아이들의 형편과 성격, 취미까지 참작해 어린이들을 지도했다. 그는 아이들을 ‘나라의 미래’라고 불렀다. 청년, 부녀자를 위한 야학을 열고 방학 때는 반월리 둔대리 등을 순회하면서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며 농촌계몽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헌신적 활동에 감동한 주민들은 샘골 뒷동산 솔밭 3300㎡(약 1000평)를 기증했다. 주민들은 샘골강습소 건축 발기회를 조직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3년 1월 낙성식을 했다. 강습소 신축은 최용신의 헌신적 활동에 찬사를 보내고 존경심을 표시하는 계기가 됐다.

최용신은 1934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베신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맹장수술 후유증으로 6개월 만에 귀국했다. 천곡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민족정신을 가르치다가 결국 장 질환으로 25년6개월의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까지 후학 양성에 매진한 여성

그는 병석에 눕던 날 밤까지 교단에 섰다고 한다.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샘골)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앞길)를 어찌하나. 김군과 약혼한 후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합니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십시오.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최용신의 죽음은 샘골 주민에게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샘골강습소가 보이는 곳에 안치됐다.

그녀의 유언에 나오는 ‘김군’은 1926년 최용신과 약혼한 김학준 장로다. 김 장로는 1960년 샘골고등농민학원을 개설하고 학원 이사로 활동하면서 최용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김 장로는 농촌운동을 벌이다 1941년 일제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다. 조선대 교수까지 지낸 그는 1975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김 장로는 죽기 전 “내가 죽거든 최용신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최용신 묘 옆에 있다.

최용신은 짧은 생을 살았다. 하지만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민족계몽 정신은 이 땅에 깊이 새겨져 있다. 정부는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과 독립을 위한 행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이야기는 동아일보에 소설 ‘상록수’가 연재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두 차례 영화로도 제작됐다. 여배우 최은희와 한혜숙이 소설 속 여주인공 ‘채영신’을 맡았다. 1994년 뜻을 지닌 지역 주민들이 최용신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할 때 정부 관계자로부터 ‘어떻게 소설 속 주인공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채영신이 실존인물 최용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자료를 제출했다.

‘밀알’ 정신이 교육·농촌계몽으로 승화

기념관 주변엔 조형물과 심훈 문학비, 유훈비, 최용신 묘소, 최용신이 직접 심은 향나무, 샘골강습소 주춧돌 15개, 샘골교회가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인 샘골교회는 1907년 설립됐다. 최용신 선생의 얼이 살아 숨쉬고 있다. 최용신은 이 교회를 빌려 샘골강습소를 운영했다.

교회는 홍원삼과 홍순호 형제가 샘골 한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1911년 예배당을 건축했으며 1929년 장명덕 전도사가 이곳에 샘골학원을 운영했다. 1931년 최용신이 부임하면서 학생 수가 급격히 늘었다. 1934년 초대 담임목사로 전재풍 목사가 부임했으며, 현재 진광호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2001년 최용신에게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했다. 일제 강점기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한국교회와 사회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한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드렸던 최용신은 신학교 시절 ‘새벽 종소리에 따라 울리는 기도’라는 글을 썼다.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린이 교육과 농촌계몽을 위해 일하다가 26세로 짧은 생애를 마친 최용신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지금의 한국교회 부흥은 그렇게 헌신했던 수많은 ‘밀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절대 가치가 해체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편승해 반기독교 문화가 창궐하는 이때, 푸르고 싱싱한 상록수 신앙정신을 다음세대에 어떻게 전수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최용신처럼 우리가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희생하는 것이리라.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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