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4>] 하나님 나라는 바로 지금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현장, 1989년 독일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열린 기도회 이후 시위를 벌이는 동독 주민들의 모습,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 성 니콜라이 교회 앞 길거리 바닥에 새겨진 평화행진 기념판(사진 위쪽부터). 국민일보DB, 박양규 목사 제공
 
박양규 목사


제122문: 첫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그분의 능력과 지혜, 선하심과 의로움, 자비와 진리가 드러나도록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존중하고,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과 생각, 말과 행동을 올바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말미암아 모독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찬양을 받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제123문: 두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셔서 교회를 보존하시고, 마귀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물리쳐 주시며, 우리가 존재하는 곳에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제124문: 세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이는 우리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지 대신 하나님의 뜻, 유일하게 선한 그 뜻에 망설임 없이 순종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무와 부르심을, 하늘의 천사들처럼 기꺼이 신실하게 감당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지난 13회에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이자, 그리스도인의 특권임을 살펴봤다. 당시 유대와 그리스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기도’라는 행위는 기독교에만 국한된 종교행위는 아니었다. 그리스 종교에도 기도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사회에서 얼마나 윤리적으로 살았건, 신전 밖에 어떤 일이 있건 기도에는 상관이 없었다.

주기도문의 차별화된 간구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은 다른 종교의 기도와는 달랐다. 특히 전반부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22∼124문에서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핵심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그곳에서 그 분의 계획과 뜻을 이뤄간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단독으로 계획을 이뤄 가시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 곳에서 그 뜻을 이뤄 가신다. 이 간구 속에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무게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를 확대한다면, 세상 역사는 정치 경제 군사적 논리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자 사회적 책임감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나라는 사후 세계에 펼쳐질 장소가 아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골1:13). 하나님 나라는 통계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많아지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역사학자들은 313년 밀라노 칙령 이전의 기독교 인구를 아무리 많이 잡아도 5% 미만이라고 추정한다. 소수였지만 이 시기 기독교는 사회의 양심이며, 윤리의 표준이었다.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늘어났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아닌 중세 암흑시대를 열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Kingdom of Heaven)를 이루자고 십자군 연설을 했던 우르반 2세가 주목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축재(蓄財)였다. 그 결과, 십자군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닌 살육의 광기가 확산됐다.

우리가 사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가? 하이델베르크 122문에 명시된 것처럼 우리의 삶과 생각,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 곳곳마다 십자가 첨탑이 있지만 십자가 네온사인이 사회를 밝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첨탑 아래 교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일 라이프치히 평화기도회와 한국의 광화문 촛불

1989년 11월 9일은 동서의 분단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다. 동서독의 통일은 정치 경제 논리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럴 수 있겠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물결이 있었다. 그것은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평화 기도회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한달 전 10월 9일에 라이프치히 평화행진이 있었다. 동독 정부는 시위대를 진압했지만 그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비폭력 평화행진을 통한 통일의 열망은 견고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평화행진의 시작은 1982년부터 월요일 오후 5시 독일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 기도회였다. 월요 기도회는 점점 참가자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통일을 위한 기도회였지만 기도의 범위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그러던 중 ‘바보처럼’ 기도만 하지 말고 거리로 나가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기도회를 중심으로 한 비폭력의 원칙은 끝까지 지속되었다. 1989년 9월, 2000명의 시민들이 기도회에 참여했고, 교회 밖에는 평화를 소망하는 촛불이 넘실거렸다. 촛불을 밝힌 평화 기도회, 그에 따른 평화 행진이 어우러진 거대한 물결은 독일의 역사를 바꿨다.

평화기도회가 촛불의 물결을 만들어 낸 라이프치히의 사례와 달리, 우리 사회가 걸어온 과정을 보면 촛불과 기도회는 평행선을 그려왔다. 사회에서는 개혁 열망을 담은 촛불이 일어날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례가 많았다.

보편적으로 한국교회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 어쩌면 신전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얼마나 윤리적으로 살았는지 관심이 없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라는 ‘신전’에 고립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광화문의 촛불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었는지 증명했다. 한국교회가 사회 곳곳에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 때, 사회에 만연한 거대한 부조리와 모순들은 횃불 앞에 소멸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통계적 증가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진원지가 되기를 소망한다.

▶ 나눔과 적용을 위해 생각해 볼 것은?

☞ 주기도문 전반부의 세 가지 간구는 어떤 깨달음을 주나요?

☞ 독일의 라이프치히 평화기도회와 한국의 광화문 촛불집회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고, 또 어떤 점이 다른가요?

☞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기 위해 한국교회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글=박양규 목사

△서울 삼일교회 교육디렉터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2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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