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세기말, 진정한 삼류들의 초상


 
①영화 '넘버 3'의 포스터. ②초라한 조직의 두목으로 분한 송강호가 원맨쇼를 하듯 펼치는 괴상한 연기는 '넘버 3'의 인장과 다름없다. ③'넘버 3'를 '말의 영화'라고 부른다면, 화면 위에 떠오르는 문자의 엉뚱함도 한 몫을 한다. ④한석규와 최민식은 드라마 '서울에 달'에 이어 다시 만나 팽팽한 긴장의 앙상블을 보여준다. 필자 제공
 
송능한


"예전에 말이야, 최영의라는 분이 계셨어. 전 세계를 떠돌면서 맞짱을 뜨신 분이지. 그 양반이 황소뿔도 여러 개 작살내셨지, 황소뿔. 그 양반 스타일이 이래. 딱 소 앞에 서면 말이야. 너 소냐, 나 최영의야. 그리고 그냥 소뿔 딱 잡어. 잡고 그냥 무조건 내리치는 거야. 소 뿔 빠개질 때까지. 코쟁이하고 맞짱 뜰 때도 마찬가지야. 헤이, 존슨, 유, 유 로버트 존슨? 나 최영의야. 그냥 걸어가. 뚜벅뚜벅 걸어가. 그러면 핫! 이렇게 손이 올라가게 돼있어. 그러면 최영의가 딱 잡어 내리치는 거야, 무조건 이 팔 치울 때까지. 이 무대뽀 정신, 무대뽀, 무대뽀, 그게 필요하다."

불사파의 두목 조필(송강호)이 허름한 여관방에서 달랑 셋 뿐인 조직원들을 앞에 두고 일장연설을 하는 중이다. ‘넘버 3’를 보지 않았더라도 이 순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이다. 여기서 송강호가 펼친 연기는 당대 수많은 개그맨들의 단골 모방 대상이었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돌들이 ‘개인기’를 자랑할 때마다 종종 소환되곤 한다. 이 장면에 일렁이는 해괴하고 강렬한 기운은 마치 조폭영화의 원체험처럼, ‘넘버 3’ 이후 제작된 유사 장르물들이 (비록 성공한 적은 없지만) 미치도록 닮고 싶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넘버 3’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이 장면의 인기는 조필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송강호 없이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우리가 상상해 온 조폭의 모습을 그럴 듯하게 모사한 게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조폭의 형상을 창조해내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형상이 오직 말의 힘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더듬거리는 말투와 종잡을 수 없는 발성, 말의 괴이한 리듬과 호흡, 거기 깃든 맹목성과 무식함과 폭력성, 그리고 그것들이 뒤섞이며 자아내는 신기한 활기. 그간 조폭을 재현하는 데 동원되던 정형화된 행동양식이나 사건, 혹은 특정 지역의 사투리를 경유하지 않고도, 아니, 않음으로써 이 장면은 독특하게 살아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조필은 실전에서는 제대로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는 가장 우스꽝스럽고 무력한 깡패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 조폭영화의 계보 속에서 언제나 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건 깡패의 기질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체현하는 배우 혹은 인물의 몸과 언어다. 그 기질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상투적이고 뻔한 장치들에 기대지 않고 한 인물의 육신만으로 온전히 전달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신기했던 것이다. ‘넘버 3’를 한국영화사에서 손에 꼽히는 ‘캐릭터의 영화’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영화의 이러한 연출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개의 챕터 중 두 번째 챕터의 제목인 ‘쌈마이들’을 빌려 말하자면, ‘넘버 3’는 각계각층의 ‘쌈마이들’을 모아 그 캐릭터들을 통과해서 ‘쌈마이 정신’이라는 것을 제대로 구현해보려는 영화다. 그리고 송강호의 저 장면이 증명하듯, ‘말’은 그 정신의 핵심이다(송능한 감독은 ‘넘버 3’가 “말의 영화”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말의 내용이 지닌 의미가 아니라, 말의 형식이 지닌 맛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도강파의 조직원인 태주(한석규)는 조폭의 피로한 일상에 대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대기업 성공신화의 상투어를 바꿔 이렇게 표현한다. “나와바리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의 아내 현지(이미연)가 쓴 시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를 염두에 둔 듯 이렇게 끝난다. “내 나이 스물아홉. 섹스는 끝났다.” 의미로 가득 찬 점잖은 것들을 비틀어 한순간 가볍게 추락시키는 데서 쾌감을 발견하는 행위를 우리는 패러디라고 부른다. 하지만 여기, 패러디라는 용어를 들이대기조차 민망한 말들의 잔치가 더 눈에 띈다.

요컨대, 조필은 자신들을 지칭하는 ‘불한당’이라는 단어를 ‘아니 불(不)’과 ‘땀 한(汗)’의 조합이라고 강조하며 노가다라도 뛰어야겠다는 조직원들에게 땀 흘리는 일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도강파 보스의 아내인 지나(방은희)는 시보다는 육체에 더 관심이 많은 시인 랭보(박광정)를 유혹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는 람보씨가 대필해주고 우린 다른 것만 해요.” 포주와 사기꾼들이 기껏해야 서로를 등쳐먹는 순간에 어이없게 갖다 붙이는 고사성어들은 마치 발이 달린 것처럼 화면 위에 문자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말의 껍데기를 가지고 한껏 노는 일,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생각하는 진정한 삼류의 수사학인 것이다. 조폭의 언어건, 시의 언어건 그것이 진정한 삼류의 수사학인 한에서, 여기 위계는 없다. 재떨이를 보고 “이 놈은 왠지 데까당하군요”라고 말하는 시인의 눈이나, 재떨이를 칼 대신 던져 쓰는 깡패의 눈이나 상상력의 차원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냐고, 이 영화는 이죽거린다. 그 이죽거림이 응시하는 곳은 ‘쌈마이들’의 무지함이 아니라, 고급과 저급, 우아함과 천박함을 가르며 자족하는 일련의 태도다. 그런 태도는 조폭의 무식함을 그저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최근 ‘깡패영화’들의 흐름과도 분명 구별된다. ‘넘버 3’에서 ‘쌈마이들’이 구사하는 말의 패턴은 다소 부풀리자면 이 영화가 견지하는 일종의 철학 같은 것이다.

송능한은 당대의 사회적 풍토와 기존 깡패영화의 장르적 관습 모두에 대한 분노에서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누누이 밝혀왔다. 깡패, 법조인, 정치인, 먹물의 이중적인 초상은 물론이고 매번 같은 틀을 답습해 온 ‘깡패영화’들이 ‘넘버 3’가 공격하고 놀려먹는 대상들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인과관계 안에서 직진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관습적인 서사의 전략은 당연히 이 영화의 방식이 아니다. ‘넘버 3’가 추구하는 그 방식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목이 영화의 후반, 한꺼번에 몰아친다. 장소는 룸살롱이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여러 개의 방 안에서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한 곳에서는 도강파와 야쿠자의 보스들이 화해를 하는 중이다. 옆방에서는 이들의 부하들이 독도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다른 방에서는 남자 시인들이 현지를 포함한 여자 습작생들을 데리고 헛소리를 떠드는 중이다. 잠시 후, 그곳에서 시인 랭보와 지나는 섹스를 한다. 태주는 조직 무리들이 있는 방을 나와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 조필 일당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잠입한다. 그러던 중, 야쿠자들과 도강파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애매한 시점에 잘못 던져진 재떨이로 인해 싸움이 커진다. 도강파에 의해 살해당한 줄 알았던 마검사(최민식)가 그때 하얀 연기를 뚫고 코미디의 한순간처럼 부활한다. 그야말로 모든 게 엉망진창인 상황이다.

그간 여기저기 흩어졌던 이야기 조각들이 마침내 하나의 시공간 안에 모여 있는데, 서사는 정리되기는커녕 어처구니없이 만나 폭발한다. 이 장면들이 등장하는 챕터의 제목은 무려 ‘카오스’다. 경찰이 던진 연막탄 속에서 방을 뛰쳐나와 서로 부딪치는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폭력과 법의 대립, 복수와 처단의 클라이맥스보다는 그간 영화가 여러 캐릭터들을 오가며 비축해 온 에너지를 한꺼번에 분출하는 난장판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대립각을 갖춘 싸움이 아니라, 삼류들의 각기 다른 몸이 별반 다르지 않는 수준에서 뒤엉키는 충돌의 현장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한편에 속이 빈 말들의 향연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한편에는 그 말들을 마치 주술처럼 불러내는 몸들의 전시가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섹스하는 시인의 몸, 칼과 재떨이를 든 깡패의 몸, 권투로 몸을 다지는 검사의 몸 등은 사회적 위상이 아니라, 그들의 맨몸을 치장하는 말의 허세로 구별될 따름이다. 마검사의 맹장수술 자국과 태주의 배에 새겨진 칼자국, 부하의 몸에 그려진 문신이 사우나의 비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공존하는 장면을 상기해보자. 세상의 모든 조폭영화들이 결국은 남성성의 우열을 놓고 대결한다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남성성(들)은 한마디로 말해 거기서 거기다. 대결로 폼을 잡을 바에는 유희로 끌어내리겠다는 것이 이 영화의 세계관일 것이다. 살육하고 부패하면서도 피 흘리고 눈물 흘리며 이상한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근래의 조폭영화 속 남성상 같은 것은 여기 없다.

1992년 겨울에서 시작된 ‘넘버 3’의 세계는 이 영화가 개봉된 해인 1997년을 지나 기어이 2001년의 에필로그에 도달한다. 21세기를 의식하며 어찌 되었든 세기말을 살아남은 삼류들의 초상이 다시 등장한다. 그 사이 마검사는 타락했고 조필은 어디선가 귀환하는 중이고 태주는 수감되었고 현지는 아들을 낳고 시인이 되어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이 상상하던 대로 무언가 달라진 걸까, 혹은 무엇도 달라지지 않은 걸까. 영화는 교도소 기둥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미소를 짓는 태주의 얼굴로 끝내며 21세기, 또 다른 삼류의 세계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이십여 년이 지난 현재, 그 에필로그를 상기하는 우리는 ‘넘버 3’가 세기말에 상상했을지도 모르는 ‘깡패영화’의 미래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자리에 와 있다. 하지만 대답은 흥미진진하지 않다. 21세기로 진입하면서 조폭영화는 전에 없이 호황을 누리게 되었지만(‘친구’ ‘두사부일체’ ‘조폭마누라’ ‘신라의 달밤’이 한꺼번에 개봉된 해는 2001년이다), 이들에게 ‘넘버 3’는 영화적 갱신의 대상이 아니었다. ‘깡패영화’의 관습에 대한 염증으로 시작된 ‘넘버 3’의 정신은 독창적으로 계승되는 대신, 이 영화의 특정 장면들만이 조폭 장르의 클리셰처럼 반복적으로 소비되었다. 21세기의 ‘깡패영화’들은 더 잔인한 폭력, 더 강력한 법, 더 퇴행적인 캐릭터를 불러들이며 장르의 관습을 지루하게 답습하고 있다. 관객들도 이들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몇 년간 흥행에 성공한 범죄장르들의 목록을 당장이라도 떠올려보라. 세기말의 저 울퉁불퉁하고 혈기왕성한 삼류들의 힘과 정면으로 대결할만한 영화의 이름이 과연 하나라도 생각나는지.

■송능한 '넘버 3'로 청룡영화제 각본상·신인 감독상

1960년에 태어난 송능한(사진)은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 출신으로 1986년 김호선 감독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2'의 각본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감독 황규덕) '태백산맥'(임권택) '보스'(유영진) 등의 각본과 각색을 거쳐 1997년 자신이 쓴 시나리오 '넘버 3'로 감독 데뷔했다(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이 그의 형이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독창적인 화법으로 무장한 이 영화는 9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에 대한 풍자와 조폭영화의 관습에 대한 조롱을 골자로 한다. '넘버 3'는 그간 본 적 없던 희한한 캐릭터들과 그들로 분한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등의 인상적인 연기, 다각도로 흩어지는 서사, 예상불가능하게 분출되는 에너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한다.

송능한은 이 영화로 그해 청룡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신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넘버 3'의 성공에 힘입어 1999년 그가 내놓은 영화의 제목은 '세기말'이다. 세기말, 한국사회의 풍경을 네 개의 장('모라토리엄' '무도덕' '모럴 해저드' 'Y2K')으로 구성한 이 영화는 '넘버 3'에서 선보인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서사적 실험을 좀 더 밀고 간다. 야심찬 시도에도 불구하고 '세기말'은 영화적 활력 면에서 '넘버 3'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그가 다시 돌아와 정치풍자 코미디인 '38광땡'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그는 21세기가 여전히 기다리는 20세기의 가장 개성적인 감독들 중 하나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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