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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트] 돋보기 대신 오디오북

카를 스피츠베크 ‘책벌레’


나이 먹는 게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경험이 쌓이다 보니 실수가 줄고, 실패해도 예전만큼 덜 아팠다. 불운이 찾아와도 “왜 하필 나에게”라고 고함치기보다는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게 있나 봐” 하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미운 사람이 있어도 싸우기보다 무시할 줄 알게 됐다. 지혜가 생겼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지만 확실히 청년 시절보다 생각이 깊어졌다. 체력이 떨어지는 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는 생리적 변화이니, 푸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박에 “아니요”라고 할 거다.

하지만 딱 하나, 노안만은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흔 중반을 넘어가면서 어두운 곳에서 글자가 읽히지 않고, 작은 글씨를 읽다 보면 금세 지쳤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늙어서도 놓지 않을 취미로 삼아왔는데, 노안이 찾아오자 노후적금의 잔액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돋보기 쓰면 되잖아요”라고 하겠지만 그게 육상 선수가 지팡이 짚고 달려야만 하는 상황처럼 여겨져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노안도 나만의 방식으로 대처해 보자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잔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조금만 읽어도 눈이 피로해진다면, 차라리 귀로 책을 읽자. 오디오북이 인터넷에는 넘쳐났다. 고전도 있고, 베스트셀러도 있고, 강연이나 사람 사는 이야기도 귀로 읽을 수 있었다. 해질 무렵 차를 마시며 오디오북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를 듣는 것도 꽤 운치 있었다. 등이 깊은 소파에 앉아 창밖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알듯 말듯한 추상화에 시선을 두고 흘러나오는 책 낭독을 듣고 있는 노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니 꽤 괜찮은 그림이 나왔다. 그래 이거다. 노안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돋보기 대신 나는 오디오북을 선택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생각으로만 내려놓고 받아들였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없다. 다른 체험을 해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사람이 변한다. 노안 때문에 서글펐던 마음이 오디오북이라는 새로운 체험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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