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접촉하지 않고 접속하는 사랑


 
①영화 ‘접속’의 포스터. ②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야 두 남녀는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③과거의 상처를 지닌 이 낡은 앨범은 새로운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도 한다. ④엔딩 장면에 흐르던 사라 본의 이 노래는 그해 가장 인기를 얻은 영화 O.S.T였다. 필자 제공
 
장윤현 감독


“1980년대가 투쟁하는 시기였다면, 90년대에 우리는 대화할 것이다.” 1997년 9월, 영화지 ‘KINO’는 ‘한국영화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기획에서 이 한 문장으로 ‘접속’을 정리한다. ‘투쟁에서 대화로.’ 그해 극장가를 휩쓴 ‘접속’의 돌풍을 바라보는 당대의 대표적인 시선일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 ‘투쟁’과 ‘대화’의 구도를 대체할 짝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대의명분에서 개인주의로, 정치에서 문화로, 운동으로서의 영화에서 소통으로서의 영화로. ‘접속’의 감독 장윤현과 제작자 이은이 1987년에 결성된 영화단체 ‘장산곶매’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줄곧 환기되었다. 공동작업 방식으로 상업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 제도에 대항하며 영화를 통해 현실 참여 의지를 모색하는 것이 ‘장산곶매’의 정신이었다. 그들은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오! 꿈의 나라’를 만들었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그린 ‘파업전야’를 경찰들과의 대치 속에서 함께 지켜냈다. 그로부터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80년대 독립영화의 투사들이 상업영화의 시스템 한가운데에서 멜로드라마를 들고 화려하게 다시 등장한 것이다. ‘장산곶매’의 혈기가 아닌 ‘명필름’(대표 심재명, 이은)의 세련된 기획으로.

물론 ‘접속’을 중심으로 80년대와 90년대를 구별하는 위의 이분화된 구도는 편의적이고 단순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와 이에 대한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에 근거해서 ‘접속’이 어떤 이행기에서 태동한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별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새롭다고 단언하기는 망설여지지만, 과거와는 다른 무언가가 ‘접속’을 둘러싼 현상에는 존재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보는 건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이 새겨진 거리의 바닥이다. 비가 오는 중이다. 바닥을 훑던 카메라의 시선은 극장 안에서 막 나와 빗줄기를 바라보는 여인에게 멈춘다. 곧 극장 문이 열리고 인파 속에서 한 남자가 나와 담배를 문다. 여자가 남자를 흘낏 보는 것 같지만 그들은 모르는 사이다. 이내 남자가 머리 위로 가방을 들고 빗속으로 뛰어간다. 여자도 그렇게 사라진다. 카메라는 이들을 뒤쫓는 대신, 텅 빈 하늘로 고개를 들고, 빗소리 위로 쓸쓸한 재즈 음악이 등장하며 영화의 제목이 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시의 밤 풍경으로 이동한다. 영화는 움직이는 차 안의 시선으로 거리의 네온사인, 사람들, 지하철 등을 스쳐지나간다. 차 안에 타고 있는 인물, 그러니까 시선의 주인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 풍경들 위로 라디오 방송의 잔잔한 목소리가 말한다. “삶은 때로 먼 길을 원합니다.”

‘접속’의 초반부를 다소 길지만 자세히 묘사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 이미 영화 속 세계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극장과 거리와 지하철을 채우는 군중들 속의 낯선 개인들. 어두운 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에서 반짝이는 불빛. 라디오에서 나오는 차분한 음성과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나른한 음악. 이들이 한데 모여 천천히 빚어낸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풍경의 파편들은 특정 인물의 시선에 귀속되지 않는다. 서사적 효용을 위해 기능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들은 다만 자체적인 리듬 안에서 충돌하지 않고 적당히 감상적으로 유연하게 움직임을 지속한다.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분위기다. 이 영화가 도입부에서 몰두하는 바는 인물들의 내면이나 성격, 혹은 사건의 전조 같은 것들이 아니라, 바로 이 익명의 분위기를 우선적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그것의 정체는 ‘9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같은 거창한 말로 포장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접속’은 인물의 감정과 관계를 파고 들어가기보다는 인물이 속한 분위기의 표피를 느끼는 데 방점을 두는 멜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손짓한 관객들은 그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취향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니 ‘접속’에 대해 좀 ‘다른’ 멜로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건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소들에서 기인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접속’은 등장인물이나 그들이 얽힌 사연이 아니라 사물들과 공간들이 더 먼저 떠오르는 멜로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비롯한 LP 음반들, 폴라로이드 카메라, 인공눈물, 라디오, 자동응답기, 호출기, 그리고 컴퓨터. 혹은 극장, 카페, 라디오 방송국, 홈쇼핑 사무실, 원룸 아파트, 편의점. 당대 가장 현재적인 것들과 적당히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것들이 적절히 뒤섞인 이 목록이야말로 영화의 중심인 것이다.

인물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이런 식이다. 그녀는 극장을 혼자 가는 여자다. 그녀는 편지 대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편지를 찍어 사진으로 보내는 여자다. 그는 첫사랑이 돌려보낸 희귀음반, 미국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패일 블루 아이즈(pale blue eyes)’를 듣는 남자다. 그는 자동응답기를 이용하며 편의점에서 생필품을 사고 원룸에 사는 남자다. 무엇보다 그들은 PC 통신 유료 가입자가 100만명을 훌쩍 넘어가던 시기, 밤마다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화를 시도하던 존재들이다. “골고루 염색한 여자는? 세심한 여자” “부분부분 염색한 여자는? 적극적인 여자” “새까만 머리를 그냥 두는 여자는? 고집스러운 여자” 같은 상투적인 문답이 사적인 대화의 요체가 되는 걸 즐기던 이들 말이다.

‘접속’은 소비와 취향의 패턴을 통해 인물에 접근하는 시선이 문화적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전략을 발판으로 성공한 사례다. ‘나’를 규정하던 거대 담론이 희미해진 곳에서, 푸른 화면 너머의 타인과 대화하는 ‘나’의 개별성은 육체도, 이념도 아닌 라이프스타일로 표현되고 구별된다. 타자의 물리적인 현존을 통과해서 경험되고 의미화 되는 ‘나’는 여기 없다. 영화가 두 남녀의 직업을 각각 라디오 피디와 홈쇼핑 콜센터 상담사로 설정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수신자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도 상대의 마음에 닿는 법에 능통하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 그들은 타인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소통이라는 명목으로 취향에 호소하며 유행을 판매하는 법을 알고 있다. 이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 각각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쇼트들은 영화 내에서 지속적으로 매끄럽게 교차되지만, 실제로 두 남녀의 육체는 영화의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세 번 정도 우연히 스쳐간다). 영화 내내 우리가 본 것은 아이디 ‘해피엔드’와 ‘여인2’의 유아적인 채팅화면의 연속에 다름없을 뿐, 동현(한석규)과 수현(전도연)이라는 어른들의 연애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은 필연적이다. 몸이 아니라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를 경유한 사랑 영화니, ‘접속’은 새로운 감정의 형식을 담은 새로운 멜로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 영화는 도구의 참신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나 감정의 모험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여기서 디지털이라는 수단은 아날로그적 정서를 어쩌면 더 안전하게 아날로그적으로 보존하며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여자 혼자 극장에 가면 사람들이 흘끔흘끔 바라보잖아요”라는 하소연이라든가, “만나야 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고 들었다”는 믿음, 그러니까 이미 수백 번은 반복되었을 멜로의 낡은 글귀들이 컴퓨터의 파란 화면 위에 수줍게 떠오른다. 영화 속 디지털은 그러한 진부한 감정을 육체 없이,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며 전하는 가장 편리한 방식인 것이다. “당신이 누구인지 다 알 것 같다”며 자동응답기에 대고 울먹이던 여자는 바로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당신’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이들도 결국은 컴퓨터의 푸른 화면을 거두고 서로의 눈을 직접 마주하는 날을 맞이한다. 하지만 영화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어떤 대화도, 제스처도 없이 그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멈춘다. 이것은 접촉하지 않기 위해 접속에 몰두하는 세대의 초상일까. 이것이야말로 기괴한 신(新)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끝 장면에서 두 남녀 사이로 들려오던 사라 본의 ‘어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가 거리 어디서나 울려 퍼지던 계절이었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의 순애보가 우리의 환상을 간지럽히던 순간, 국제통화기금(IMF)의 짙은 그림자 또한 한국사회를 잠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영화 속 사랑은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었지만, 극장 밖 현실은 우리의 눈앞에서 말 그대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접속’의 남자는 이런 현실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하루아침에 직장도 때려치우고 그저 한국보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호주로의 이민을 계획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민마저 포기한 얼굴로 사랑 앞에 선다. 저 장면이 지나고, 맨몸만 남은 남자의 철없는 낭만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를 즐기던 누구도 그 이후를 상상하려들지 않았다. 불황기 속에서도 순수한 눈물을 전시하는 한국영화들만큼은 유독 선전하던 해였다. ‘접속’은 정치는 물론 경제라는 얼룩마저 철저히 삭제된 그해 최고의 무결한 상품이었다. 삶의 조건 전반이 처참히 부서지던 현실 속에서 삶의 ‘분위기’를 거짓으로라도 감각하고 싶었던 자들에게 때마침 찾아온 영화였을 것이다.

◆ 장윤현… ‘접속’으로 대종상 작품상·신인 감독상

장윤현은 1967년에 태어나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다니며 영화 동아리 ‘소나기’에서 활동했다. 그때 갓 스무 살이 되어 만든 첫 작품은 러닝타임 45분의 ‘인재를 위하여’(1987)다. 시를 쓰는 대학생이 운동권으로 몰려 취조실에서 고문을 당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당대 대학생들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교차화면과 음악 등을 과감히 사용해서 장윤현의 대중영화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영화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은 장동홍 강헌 홍기선 등과 함께 독립영화 공동체 ‘장산곶매’의 일원으로 작업하며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등에 참여했다. 90년대 초에는 헝가리 국립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장산곶매’ 동지인 이은과 함께 ‘접속’으로 충무로에 등장해서 전국 1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큰 주목을 받았다. 제작사 ‘명필름’은 이 영화로 충무로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으며 투자사 일신창투는 약 10억원의 순수익을 얻었다.

당시 영화배우로서는 신인이었던 전도연은 이 작품을 계기로 연기력을 입증 받으며 신인상을 휩쓸었다. 영화 O.S.T 또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장윤현은 장편 데뷔작으로 대종상 신인 감독상뿐만 아니라 작품상까지 거머쥐었다. 두 번째 영화 ‘텔미썸딩’(1999)은 ‘접속’에 이어 한석규를 다시 기용하고 당대의 스타 배우 심은하를 출연시켜 야심차게 만든 스릴러다. 특유의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을 적극 활용한 영화였지만, 관객들의 기대에는 크게 못 미쳤다. 이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몇 편의 영화들을 더 연출했지만 ‘접속’의 성공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2000년에는 영화사 ‘씨앤필름’을 설립하고 평단의 호평을 받은 송일곤의 ‘꽃섬’(2001), 공수창의 ‘알포인트’(2004) 등을 제작했다. 2012년에는 커피에 대한 산문집 ‘외로워서 완벽한’을 펴내기도 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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