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그 아버지, 그 어머니의 마음이 필요한 때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당시 좌익 청년에게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있었다. 살해범이 체포되었지만 그 아버지는 살해범 구명운동을 통해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다.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비통하지 않겠냐마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몸소 실천한 손 목사님의 삶은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전해준다.

최근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빗나간 탄환을 어느 병사가 쐈는지 드러나더라도 알려주지 말라. 그 병사도 나처럼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떤 부모의 자식 아니겠는가. 같은 부모로서 더 이상의 희생과 피해를 원치 않는다.” 지난 9월 철원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사망한 이모 상병의 아버지가 자식을 잃고도 빗나간 탄을 누가 쐈는지 밝히지 말아달라고 한 말이 우리 모두에게 울림을 던졌다. 또 다른 누군가의 아들인 병사가 아픔에 빠지지 않게 배려한 것이다. 철원부대의 총기사고는 군이 사격장 안전관리와 통제에 부실한 점이 있었고 보완해야 할 과제가 많음을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 잘못한 것은 지적받아 마땅하지만 사고 이후 유가족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성스러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운 군부대의 조치는 주목할 만하다.

이 상병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부대에서 조사결과를 숨김없이 설명해주고, 사단장부터 부사관까지 장례식을 잘 치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지원했으며, 현충원 안장과 순직처리 절차도 불편함 없이 진행되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과 노력에 아버지도 부대 측에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던 군이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군부대 지도자들이 같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서울중앙지법은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을 살해하겠다는 협박 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대학생에게 공소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 전 재판관이 가해자를 용서하며 그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법원에 알려왔기 때문이다. 협박죄는 피해자가 처벌할 의사가 없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라고 한다. 재판관은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은 사안임에도 피해자의 처벌불원서로 인해 처벌할 수 없게 됐음을 분명히 하면서 가해자에게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피고인 본인이 잘해서 처벌 안 받는 게 아니에요. 예?”

이 전 재판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주관한 재판관으로서 대한민국 역사의 매우 중요한 기로에서 정의로운 심판의 길을 선택했던 정의파 재판관이었다. 그런데 자식과 같은 가해자의 살해 위협에 대해 너그러운 용서를 통해 가해자가 새로운 인생의 변화를 경험할 기회를 주는,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주었다.

우리 사회에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비난과 질책을 하고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 상응한 책임을 묻는 것이 원칙일 만큼 이 세상의 대응 방법은 획일화되어 있다. 사고에 대한 처벌만이 세상을 정의롭게 하고 밝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더욱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법 집행만이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올바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욕구 없이 정의는 세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올바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욕구는 놀랍게도 무서운 법 집행으로 인한 처벌보다 조건 없는 용서,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할 때 생겨난다. 정의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도리어 무서운 법집행으로 인한 처벌은 대가를 다 치렀다는 마음에서 또 다른 복수심으로 변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법에 근거하여 처벌을 경험하며 자란 사람은 정의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적절한 용서와 무조건적인 은혜를 경험하며 자란 사람이 온전한 정의를 보여줄 수 있다. 진정한 정의는 따뜻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대는 정의가 가장 따뜻한 단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원수도 사랑한 아버지 손양원 목사, 아들에게 누가 총을 쐈는지 밝히지 말라고 한 상병의 아버지, 죽이겠다고 협박한 가해자를 용서한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 그 아버지, 그 어머니의 마음이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때다.

이재훈(서울 온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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