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옥상, 여성들의 통쾌한 해방구… 짧았던 자유


 
‘개같은 날의 오후’에서 옥상에 모여 함께 싸우는 각양각색의 여인들. 이들은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사연을 가졌다. 필자 제공
 
개봉 후 출시된 비디오 테이프 커버. 필자 제공
 
1995년 추석 시즌에 개봉한 두 편의 한국영화. '아찌 아빠'의 심은하를 억척 여인들의 반란이 이겼다. 필자 제공
 
이민용


오래된 서민 아파트 주차장에 중년의 여자들이 모여 연신 부채질을 해대고 있다. 100년 만의 무더위 속에 아파트 변압기가 터져버린 탓이다. 아파트의 뜨겁고 습한 오후가 시끌벅적한 수다로 포화될 무렵, 한 여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 밖으로 도망쳐 나온 여자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마침 그곳에서 수박을 먹다 이 광경을 목격한 여자들이 남자에게 달려들어 말리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에 있던 여자들의 남편들은 이 상황을 구경할 뿐이다. 이내 상황은 아파트 여자 주민들과 남자들 사이의 패싸움으로 돌변한다.

경찰 기동대가 출동하고 애초 싸움의 발단이 된 남자는 응급차로 실려 가던 중 사망한다. 한순간 살인자로 몰리게 된 여자들은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문을 걸어 잠근다. 진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1995년 추석 시즌에 개봉한 ‘개같은 날의 오후’의 선전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로 이제 막 장편 데뷔를 한 사람이었고, 배우들은 연기력으로는 의심할 나위가 없으나 스타급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이들이었다. 더욱이 같은 시기에 개봉한 ‘아찌 아빠’(감독 신승수)가 TV 드라마 ‘마지막 승부’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심은하를 기용하며 관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차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같은 날의 오후’가 거둔 의외의 성과는 분석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여성 인물이 재현되는 방식, 무엇보다 여성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이유에 대한 다른 진단이 필요했다. 때리는 남자에 맞서 여자도 물리적으로 반격할 수 있다는 사실의 통렬함. 다수의 일간지들이 그 날 것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단어는 페미니즘이다.

영화 주간지 ‘씨네21’(26호)은 “페미니즘 영화 뜯어보기: 90년대 여성영화의 새로움”이라는 기획을 주도했다. 마침 같은 해 10월에 개봉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오병철)는 ‘개같은 날의 오후’와 함께 여러 일간지에서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되었다. 두 영화는 ‘오늘의 여성 어디로 가야하나’(동아일보, 1995.5.8)에 대한 대답 혹은 ‘가을 극장가 여성 만세’(한겨레, 1995.10.14)라는 성취로 논평되는 식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 ‘기는 남자에 나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두 영화에 대한 각계 남자 전문가들의 불안감을 전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기사도 있었다(경향신문, 1995.10.26).

현재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그해 이 영화가 여성의 저항적 행동을 전면화하며 얻은 반향이 그저 우연한 결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요컨대, 서울대 여자 조교가 남자 교수를 상대로 낸 성희롱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배상 판결을 받아낸 해는 1994년이었다. 이 사건과 영화의 흥행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다만 당대의 여성들이 나누던 공분과 그 감정의 잠재된 폭발력을 짐작해볼 수는 있다. 여성들에게 가해진 성적인 폭력이 공식적인 처벌의 대상이 된 순간을 목격한 경험이 이 영화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과 아예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일종의 문화현상으로서 이 작품에 쏟아진 관심과는 별개로, 한 편의 여성영화로서 ‘개같은 날의 오후’의 정치성은 좀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소 거칠지만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극장을 찾아 환호하던 여성 관객들은 ‘개같은 날의 오후’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을까. 이 영화의 성공요인이 앞서 언급한 기사들의 지적처럼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기류에만 근거한 것이라면 반문은 뒤따른다. 한 해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며 개봉 14일 만에 68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2년 뒤, 속편으로 또 한 번 흥행에 성공한 ‘투캅스’(강우석)는 페미니즘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이른바 ‘마초’ 영화다. 1995년 하반기 화제작인 ‘개같은 날의 오후’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하며 상반기 관객의 사랑을 받은 영화의 제목은 무려 ‘마누라 죽이기’(강우석)다. 페미니즘이 당대 극장가의 흐름 일부만을 형성했다고 해도 이러한 현상이 매끄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여성주의의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의 차원에서라면, 같은 해 개봉된 ‘삼공일 삼공이’(박철수)가 먼저 수면에 올라야 마땅하다. 음식에 대한 집착에 시달리는 여자와 거식증에 걸린 여자를 다룬 ‘삼공일 삼공이’는 그러나 앞선 두 여성영화처럼 ‘여성’의 맥락 안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영화보다는 실험영화라는 범주로 종종 말해졌다. ‘비정상적인’ 여자들의 욕망이 안기는 모종의 불편함과 불쾌감이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응을 차단했을 것이다.

그러니 ‘개같은 날의 오후’가 여성영화의 맥락 안에 놓이더라도, 흥행요인은 여성영화로서의 이질성이 아니라, 어떤 무난함에서 찾는 게 적절해 보인다. 이질적인 것들의 무난한 용광로가 되길 자처한 영화의 전략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여자들이 힘을 합쳐 폭력 남편을 집단구타한 후 그 세계에서 제거해버린다는 설정은 오늘날의 영화들과 비교해도 가히 돌출적이다. 한국 영화사에서도 유일무이한 장면이다. 이 냉혹한 순간이 일련의 복수극들과 달리 코미디 드라마의 일부로서 여자들의 수다에 밀려 금세 망각된다는 점도 기이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가장 과격한 힘은 영화의 초반, 바로 이 장면에 압축되어 있고, 이후의 정신없는 상황들은 사족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요란한 사족에 ‘개같은 날의 오후’가 지니는 상업영화로서의 두드러진 영리함이 자리한다.

그 영리함의 전략은 이렇게 풀어낼 수 있겠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상반된 질문을 동시에 던지며 상황을 구축하고 있다. ‘어떤 대립각을 세울 것인가’만큼 중요한 건 ‘어떤 경계를 지울 것인가’의 문제다. 달리 말해, ‘무엇을 충돌시킬 것인가’만큼 고심하는 건 ‘무엇을 융화시킬 것인가’의 물음이다. 우선 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두 개의 축은 다음과 같다. 아파트 주차장의 남자들과 옥상의 여자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남자들은 경찰이며 여자들은 평범한 주민들이다. 경찰들은 남성 일반의 폭력성과 무력함을 부각하는 존재로, 여자들은 일상의 폭력에 반기를 든 건강하고 능동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동질적이고 획일적인 남성 집단과 다양한 직업과 개성을 지닌 여성 개개인들이 대치한다. 그런데 이 영화 특유의 생동감은 이러한 이분화된 구도 자체에만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민 아파트라는 공통의 지반 위에 존재하지만, 옥상 위 여자들은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기혼과 비혼, 유흥업소 종사자, 식당 노동자, 밤무대 가수, 트랜스젠더가 아파트의 안이라고도 밖이라고도 말하기 애매한 공간에 공존한다. 이들의 기질적 차이는 대체로 이 싸움의 흥을 돋우는 동력이 되지만, 바로 그런 차이가 이 흥에 종종 찬물을 끼얹는다. 남편과 바람을 피운 여자가 무리 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된 때, 밤무대 가수가 실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여자들은 당황하고 동요한다. 하지만 영화가 견지하는 ‘용광로적’ 태도는 곧 명확해진다. 영화 속 누군가의 해법처럼 “외롭고 소외받은 사람들”이라는 상위의 범주가 모든 차이들을 이내 녹이는 것이다. 차이가 야기하는 충돌은 화합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이물질이 된다. 사회 구조적인 차원이 삭제된 채, 트랜스젠더가 받는 고통과 혼자 사는 여자가 겪는 외로움은 별다른 과정 없이 동일한 선상에서 이야기된다. 옥상 위에서만 가능할 이러한 환상과 기만을 영화는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활력으로 적극 추진한다.

남편들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남자 경찰들은 시종일관 우습게 그려진다. 제복을 입고 권위적인 말투로 명령을 일삼는 경찰은 전술적으로도 여자들에게 밀린다. 경찰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여자들의 허기짐을 자극하기 위해 아파트 주차장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것이 전부다. 아파트 안에서 활보하던 도둑들이 물건을 잔뜩 훔쳐 빠져나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처럼 희화화된 경찰 기동대의 모습이 공권력에 대한 조롱이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대의 공권력이 실제로 놓인 폭력적인 맥락들, 혹은 현실정치의 얼룩은 영화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이 집단의 형상은 가부장제라는 구조를 지속적으로 환기하기보다는 결국 코미디 속 기능으로 축소된다. 결말에 이르러 옥상에서 내려온 여성이 기동대장에게 악수를 청하는 다소 뜬금없는 화해의 제스처도 그렇게 이해된다.

여자들이 옥상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면 옥상 이후, 이들은 어떤 삶을 마주하게 될까. 사실 옥상의 축제를 즐기는 동안에도 이 질문은 보는 이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진압대가 아파트에 들어서고 여성단체들이 피켓을 들고 응원을 보내며 언론의 취재 열기가 뜨겁다. 더 이상 버틸 명분이 없음을 깨달은 여자들은 마지막으로 손을 맞잡은 후,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옥상 아래로 나비처럼 몸을 날리는 여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보다 몇 해 전, 영화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콧)가 두 여자에게 선사한 결말이 잠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이들의 차가 절벽을 향해 돌진하며 공중에 뜬 순간, 영화는 시간을 정지시켰다. 완전한 자유의 희열을 안긴 그 결말이 죽음의 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섬뜩한 슬픔을 안겼다. 하지만 ‘개같은 날의 오후’에서 추락하는 여자들에게는 안전장치가 있다. 아파트 화단에는 튼튼한 에어매트가 놓여 있고, 이들에게는 귀환할 집과 가족이 그대로 있다. 이 안전장치를 정녕 해피엔딩이라고 불러야 할까. 폭력을 일삼던 남편 하나는 깨끗이 사라졌지만, 이 세계의 무엇도 별반 훼손되지 않은 채로 영화는 쾌활하게 웃으며 안온하게 끝난다. 이제 불합리한 현실로 다시 돌아갈 시간인 것이다. 옥상에서만 가능한 통쾌함과 해방감을 ‘페미니즘’이라 부르며 자족하던 시절이었다.

■ 이민용, 사회 풍자 데뷔작으로 신인 감독상 석권

숭실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거친 이민용(사진)은 박철수 송영수의 조감독 생활을 했다. 오랜 시간 첫 장편을 준비하다 1995년, 마침내 '개같은 날의 오후'라는 사회풍자 코미디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변두리 서민 아파트를 배경으로 정선경 김보연 송옥숙 등 여자 배우들을 대거 출연시킨 이 작품은 당대를 대표하는 여성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추석 시즌에 개봉해서 27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특히 중년 여성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지자체 선거에 출마한 김을동 대신 가수 임희숙(이민용의 친누나이기도하다)이 식당일을 하다 옥상에 오르는 여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58년 개띠 감독은 '개같은 날의 오후' 하나로 대종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의 여러 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휩쓸었다. 2년 뒤, 그가 선보인 '인샬라'는 북한 남자와 남한 여자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렸지만 흥행에 참패했다. 이영애와 최민수를 기용해 모로코 사막에서 사랑의 대서사를 담으려던 영화의 야심은 데뷔작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3년 개봉한 '보리울의 여름'은 '보리울'이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신부와 수녀, 스님과 아이들이 정답게 어울린 영화였다. 하지만 역시 '개같은 날의 오후'의 명성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이후 이민용은 독도를 소재로 한 영화에 10여년을 매달리지만 끝내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현재는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강철 무지개'를 탈고하고 내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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