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우리 소리’가 손수건을 적시다


 
‘서편제’의 가장 유명한 장면. 임권택 감독은 “만일 우리가 삶이라는 역경의 여정을 늘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바로 그런 길일 것”이라고 이 장면을 묘사했다. 필자 제공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 송화와 동호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에 놓은 '서편제'의 후속작. 필자 제공
 
트로트 가수 배일호의 앨범 '신토불이'. 우루과이 라운드를 반대하는 각종 집회장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필자 제공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장군의 아들3'(1992)의 차기작으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계획하고 있었다. TV에서 방영되던 미스 춘향 선발전에서 앳되고 고전적인 풍모를 지닌 오정해를 발견하고 눈이 번쩍 뜨인 뒤 반드시 그녀를 '태백산맥'에 기용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준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이념적 문제를 다룬 영화는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정부 부처 관계자의 경고와 주의를 들었고 그는 일단 한발 물러서야만 했다.

임권택은 새로운 시대를 기다렸다. 그 해에 치러지는 대선에서 김영삼 내지는 김대중의 당선이 유력할 것이라 예상한 그는, 그렇다면 ‘태백산맥’을 만들 수 있는 때는 금방 다시 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대신 오랫동안 마음 한 쪽에 있었던 판소리에 대한 관심, 이청준의 원작 소설에 대한 기억, 오정해에 대한 인상 등이 뭉쳐져 다른 영화 한 편이 충동적으로 추진되었다.

‘서편제’(1993)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만약 ‘태백산맥’의 영화화가 시대의 순풍을 타고 무리 없이 진행되었더라면 지금의 ‘서편제’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훨씬 더 뒤늦게 나와 다른 형태의 무엇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뒤집어 말할 수도 있겠다. 임권택 영화의 대표작 중 한 편이자 그의 최고 흥행작이며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을 넘은 ‘서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엄혹한 시대 덕분에 탄생한 영화다.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김명곤)과 그의 의붓자식들인 송화(오정해)와 동호(김규철)는 남도 땅을 떠돌며 소리를 팔아 연명한다. 일찍이 어느 명창의 수제자였으나 그의 애첩과 정을 통했다는 죄로 파문당한 유봉이다. 어쩌다 마주치는 옛 동료들은 유봉에게 아는 척을 해 오지만 그는 도리어 그들에게 역정을 내기 일쑤다. 소리꾼으로서의 자존심만이 유봉의 모든 것이다. 그는 특히 송화를 명창으로 키우려 한다. 하지만 판소리의 시대는 지난 지 오래 되었고 그들의 유랑은 점점 더 고행의 길이 되어 간다. 참다못한 동호가 떠나버리자 유봉의 조급함이 송화에게로 향한다. 유봉은 송화에게 약을 먹여 그녀의 눈을 멀게 한다. 유봉은 송화마저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한이 맺히면 소리가 더 좋아진다는 누군가의 말에 욕심이 나서 송화의 육신에 한을 새긴 것일까.

아무래도 이 이야기 자체에는 흥행작이 될 만한 조건이 엿보이지 않는다. “돈 될 리 없다”고 감독 역시 제작사에 미리 언질을 해두었을 정도였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많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당시 서울 개봉 극장 단성사는 관객이 눈가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암전을 1분간 지속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무엇이 당대 대중의 마음을 그토록 훔치고 울린 것인가.

‘서편제’가 개봉한 같은 해에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대통령 김영삼은 5월 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깊은 감동을 공표한다. 이것이 어떤 상징적 관람 행위가 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뒤따라 정치 종교 등 각계의 지도자들이 ‘서편제’를 관람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그 분위기는 널리 퍼졌다. ‘서편제’는 민족문화의 얼을 상기시키는 창작물로 공히 인정받았으며 흔히는 ‘우리 것’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우리 것’에의 공감과 유행에 관련 지어 보자면 이 시기에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가 더 있다. 훗날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린 서태지는 1993년에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을 내고 타이틀곡 ‘하여가’를 발표한다. 당대의 가장 세련된 대중음악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곡의 정점에서 돌연 휘날리듯이 등장하는 태평소 가락은 예상 밖이지만 그만큼 돌발적이어서 매력적이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도 이즈음 유행했다. 몸과 땅은 둘이 될 수 없다는 이 말은 ‘우리 것’을 대변하는 전 국민적 표어에 가깝게 활용되었다. 트로트 가수 배일호는 무명에 가까웠지만 그가 부른 곡 ‘신토불이’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이 땅에 태어난 우리 모두 신토불이. …쌀이야 보리야 콩이야 팥이야 우리 몸엔 우리 건데 남의 것을 왜 찾느냐.” 이 곡은 흥에 취한 저잣거리에서 한 편의 유행가로도 들려왔지만, 당시 뜨거운 외교 정책 현안으로 떠올랐던 무역협상인 ‘우루과이 라운드’를 반대하는 집회장에서 외국 농산품목 개방을 반대하며 연일 흘러 나왔다. 같은 해 말 14개 외국 농산품의 국내 개방이 전격 확정되었다.

그러니까 이때의 우리 것 혹은 신토불이는 다양한 층위와 입장들에 폭넓게 혹은 서로 충돌하면서 걸쳐져 있었던 중요한 당대 의제였다.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행위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창작적 표현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생업의 화두였다. ‘서편제’의 경우에는 정서적 환기와 향수가 주안점이었다. “판소리가 뭔지도 모르지만 어쩌다 듣고 있으면 소리는 내 깊은 어딘가를 건드리더라, 이건 도리 없이 우리 소리”라고 임권택은 ‘서편제’의 제작발표회 때 말했다.

임권택이 말한 우리 소리, 그것의 정서를, 많이 말해져 온 것처럼 ‘정(情)’과 ‘한(恨)’으로 나누어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정’을 대변하는 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저 멀리 구부러진 능선의 돌담길을 따라 유봉과 송화와 동호가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천천히 오래 걸어 마침내 카메라 앞까지 도달한다. 그러면 그 앞에 마치 그럴듯한 무대라도 차려져 있는 듯 일행은 흥에 겨워 한참을 놀다가 자리를 빠져 나가고 카메라는 그들이 떠난 자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흥이 넘치는 장면이자 박복한 이들 사이에 정이 넘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며 ‘서편제’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그럼에도 ‘서편제’에서 한은 정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지배적이다. ‘서편제’에서라면 그 한은 민족문화를 대변하는 판소리 문화의 성격과 그 문화의 불운한 계승자들의 고되고 서러운 이야기로 집약된다. 그 한이야말로 진짜 우리 것이라는 소박한 정서가 환기되고 강조되면서 눈물 어린 향수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것이 당대 관객 눈물의 원천이었다. 그 한은 남도 사람들의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무엇으로 드러나는 대신 시대에 떠밀려 나가는 소리꾼들의 입지, 더 나아가 주변화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끝내 득음의 길을 향해 가는 송화라는 여인의 험난한 생과 육신에 새겨진다.

죽음에 다다른 유봉은 송화를 향해 자신이 그녀를 눈멀게 했음을 거론하면서, 하지만 뉘우치지는 않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제법 네 한을 소리에 실을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제부터는 네 속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하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영화 속 유봉의 마지막 모습이다.

왜 송화의 생과 육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민족적 알레고리의 역할을 그녀에게 떠안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제기는 차후에 생겨났지만, 당대의 일반 관객은 유봉의 예술적 악행을 송화의 운명적 불행으로 이해한 뒤에 우리 민족(성)에 관한 거대한 멜로드라마로 이 영화를 받아 들여 자신들의 눈물을 수긍했다. ‘서편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도리가 없는, 한스러운 우리 이야기의 가슴 아픈 예제로서 한 시대를 건넜다.

하지만 임권택은 명료한 이야기 안에 모호한 사건과 감정을 숨겨 놓는 것에도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장인이다. 신토불이에 버금갈 만한 무엇이 ‘서편제’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주목됐다. 운우지정(雲雨之情), 이 말은 사실 영화의 종결부에서 직접 거론된다. 송화와 동호가 서로의 소리와 북장단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 한 남자가 그들의 소리를 밤새 들었다며 “(당신들이)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네”라고 송화에게 지나치듯 말한다.

남녀 간의 꿈결 같은 정사라는 뜻을 품고 있는 저 말은 송화와 동호의 관계를 잘못 파악한 남자의 실수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을 전제로 장면을 다시 보면 과연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고 보면 송화와 유봉의 관계 또한 의붓아버지와 딸이 아니라 동거인으로서의 관계이기도 했다는 점은 많이 지적되어 왔다. 우리 것이라는 향수 안에 숨겨진 어떤 애증과 애욕의 관계들 혹은 강력한 신토불이 안에 묻어 있는 희미한 운우지정의 분위기들. 얼마간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 운우지정의 느낌마저 당대의 관객들이 정확히 포착했더라면 이 영화의 기록적 흥행은 가능했을 것인가. 훗날 임권택은 송화와 동호의 사랑을 확장한 내용을 소재로 하여 그의 100번째 작품 ‘천년학’(2007)을 만들었으나 안타깝게도 관객들은 ‘서편제’만큼 이 영화를 찾지는 않았다.

■감독 임권택의 등장, 한국 영화의 개벽

임권택(사진) 감독은 1934년 음력 11월 2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와 일가친척의 좌익 활동 경력이 빌미가 되어 훗날까지 오래도록 연좌제에 묶여 고통 받았다.

전쟁 중 집을 나와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하다가 우연히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정창화 감독 연출부로 일하며 실력을 닦았다.

26세에 첫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입문했다. 초기에는 전쟁물 사극 코미디 액션물 등 각종 장르물을 섭렵하며 감독으로서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 시기에 영화를 만드는 것이란 창작행위라기보다는 생업에 가까웠다고 임권택 감독은 훗날 술회하고 있다.

하지만 임권택 영화 미학의 비범한 가능성은 '망부석'(1963) '법창을 울린 옥이'(1965) '황야의 독수리'(1969) 등 1960년대의 대표작들에서 이미 엿보인다. 1970년대 들어서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1971) '둘째 어머니'(1973)등 수작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잡초'(1973)는 감독 자신도 자부심을 피력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실됐다.

'족보'(1978)를 만들며 임권택 감독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확장해 갔고 이후 '짝코'(1980) '만다라'(1981) '길소뜸'(1985) '티켓'(1986) '개벽'(1991) '태백산맥'(1994) 등 한국 문화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는 명작들을 연이어 내놓는다. '서편제'도 그 맥락 안에 있다.

이후에 임권택 감독은 '춘향뎐'(2000)을 계기로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취화선'(2001)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다.

임권택 영화 안에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온전히 담겨 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영화들이 곧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발자취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참고문헌: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 ‘한국현대사 산책:1990년대 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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