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휴전 1년 뒤 남남북녀 입맞춤이라니… 1954년 ‘운명의 손’


 
영화 ‘운명의 손’의 클라이맥스이자 종결부. 방첩대 장교 영철(이향)이 북한 공작원 정애(윤인자)에게 입맞춤하기 위해 다가가고 있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키스 장면으로 유명하다. 배우 윤인자의 남편이 이 장면에 분노해 “감독 한형모를 죽이겠다”며 서울 명동을 뒤지고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필자 제공
 
한형모


영화에는 시대가 담겨 있다. 한국영화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 한국영화들이 담아 온 시대의 초상과 공기를 이 지면에서 포착해 보려 한다. 19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는 간략하게 살피고, 주로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맞았던 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영화들에 집중해 보려 한다. 특히 대중적으로 친숙했던 작품들에 주목한다. 시대가 영화가 된 것이므로, 영화는 시대다.

영화감독 한형모의 개인사에는 시대가 새겨져 있다. 그는 감독이 되기 전 ‘태양의 아이들’(1944) ‘사랑과 맹서’(1945)의 촬영기사로 일했다. 두 영화 모두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영화이며 당대의 유명 감독 최인규가 연출을 맡았다. 한형모는 광복을 맞자 재빨리 친일의 행적을 지우려는 듯 ‘자유만세’(1946)를 촬영했다. 이 영화는 광복 기념 영화였으며 감독은 역시 최인규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최인규의 이름이 오를 때 한형모의 이름도 함께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보류되었다.

한형모는 해방 이후 ‘조선영화동맹’의 간부로도 활동한다. 정치적 지향이 명확치 않은 이들까지 두루 포함된 큰 단체였다고는 해도 좌익 계열의 영화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던 곳이어서 흥미롭다. 전쟁이 임박했을 즈음 그는 확실하게 다른 길을 간다. 반공영화의 효시 중 하나라 불리는 ‘성벽을 뚫고’(1949)를 만들며 연출자로 입문한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들어가 일하며 선전 영화 ‘정의의 진격’(1951)을 완성한다.

친일 민족주의 좌익 반공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상반된 쟁점들을 직간접적으로 거쳐 나간 젊은 한형모의 발걸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주하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영혼의 색깔을 바꾸며 삶을 지탱해 나간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꺼삐딴 리’가 문득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정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인지는 쉽게 읽어 내기 어렵다.

한형모의 이 길에서 다음의 것을 읽어낼 수는 있다. 시대의 흐름에 대하여 빠르게 반응하는 그만의 속성이다. 한형모에게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유독 많다. 그건 그가 당대의 사회 문화적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형모의 시대적 촉수는 남달랐고 감독으로 자리 잡아가던 전후 1950년대에도 빛을 발했다.

시인 고은은 훗날 “50년대의 운명과 허위와 절망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폐허를 사랑한다는 뜻이 된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썼다. 폐허란 전쟁 이후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당시 한반도의 총 인구 3000만명 중 400만명이 전쟁으로 인해 사망했고 도처에는 전쟁 미망인이 넘쳐났다. 보릿고개가 덮쳐왔고 꿀꿀이죽이 식탁에 올랐다. 범죄율은 치솟았으며 갱스터라는 말에서 깡패라는 말도 유래됐다. 미군문화가 생활의 상위가 되었고 미군의 피엑스 경제가 암암리에 경제의 최상이 되었으며 불가피한 생존의 압박 때문에 미군 기지촌으로 내몰린 여성들은 양공주 혹은 유엔 마담이라 불리며 천대받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폐허 속에는 전에 없이 새롭고 강렬한 것들도 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전후의 이 시기는 모든 것이 끝났어도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의 시기’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났어도 벌써 모든 것이 시작되어 버린 ‘욕망의 시기’였을 것이다. 이 시기를 다룬 어느 책들의 제목처럼, 전후 50년대는 한쪽에서는 삐라를 주웠지만 또 한쪽에서는 댄스홀에 홀리던 시기였고, 혼돈이 가득했다면 매혹도 넘쳐났던 시기였다. 그 들끓는 폐허의 시간을 담은 당대의 대표적인 대중문화가 영화였고 그 대표작 중 하나가 한형모의 ‘운명의 손’(1954)이다.

주인공은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 정애(윤인자)다. 그녀는 마가렛이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하고는 서울에서 ‘바걸(bar-girl)’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도둑으로 몰려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고학생 영철(이향)을 마가렛이 구해주게 되고 둘은 급속히 가까워진다. 아니 실은 마가렛이 영철을 적극적으로 유혹한다. 그런데 마가렛과 영철의 사랑이 깊어질 즈음 영철의 진짜 정체도 드러난다. 그는 방첩대의 대위다. 마가렛은 언제나 상부로부터 감시와 조종을 당하는데 이번에는 영철을 제거하라는 압박을 받고 그를 유인하여 납치한다. 하지만 마가렛은 끝내 마음을 돌리고 영철을 보호하기 위해 상관과 총격전을 벌이다 총에 맞아 쓰러진다.

여간첩이 미모의 바걸로 상상된다는 점이 우선 흥미롭다. 50년경에 실제로 있었던 김수임 간첩 사건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당시 언론들은 그녀의 미모에 집중했다고 한다. 한편으론 진위와 상관없이, 양부인으로 위장하는 여간첩, 이라는 식의 묘사를 당시 언론들이 서슴지 않았다고도 한다. 미모의, 바걸, 이라는 면모는 아마도 그런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결부에 이르면 당대의 문제적 장면이 등장한다. 마가렛은 영철의 품에 안겨 죽어 간다. 그러다 둘은 마침내 키스한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키스 장면이다. 사실은 가볍고 짧은 입맞춤에 불과하지만 여배우 윤인자의 남편이 이 장면을 보고 분노한 나머지 감독 한형모를 죽이겠다며 서울 명동을 뒤지고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관객의 눈으로 볼 때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은 이것이 단지 키스가 아니라 남쪽의 남자와 북쪽의 여자 사이에 혹은 간첩 잡는 남자와 간첩인 여자 사이에 일어난 키스라는 사실이다. ‘운명의 손’은 분단의 고착화를 예고하는 당대 분단서사의 일면이다. 그러니 어쩌면 한국영화 최초의 이 키스 장면은 고착된 분단이라는 민족적 상흔을 전형적으로 감정화하고 드라마화한 최초의 민족적 알레고리로서의 사례들 중 하나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수 십년 뒤인 1999년에 개봉하여 한국영화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칭호를 받으며 한국영화산업의 앞과 뒤를 가르는 기준점이 된 신화적 영화 ‘쉬리’에서도 이 ‘남남북녀’의 비극적 애정전선이 되풀이 된다는 사실까지 더해 본다면 ‘운명의 손’의 그 ‘첫 키스’는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운명의 손’은 개봉 당시에 이미 평론가들에게서 서사적 취약성을 지적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 스스로 탄탄한 서사성보다는 강력한 알레고리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영화 내내 신체의 일부 즉 손으로만 등장하다가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얼굴을 드러내는 마가렛의 상관은 그녀의 운명을 꼭두각시처럼 옥죄고 조종하는 영화 속 폭압적인 인물일 뿐 아니라 당시 남과 북의 정세를 조종하는 강대국들을 연상시킨다는 영화연구자의 의견도 제출된 바 있다.

마가렛과 영철의 비극적 사랑은 확실히 전쟁과 분단이라는 폐허의 소산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운명의 손’에 깃든 새로운 욕망이란 무엇일까. 그 폐허 위에서 피어난 새로운 삶의 유형과 유행이란 무엇일까. 중요한 세 장면을 말해보자. 먼저 영철이 마가렛의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장면이다. 영철은 마가렛의 방 안을 장식한 서양식 그림과 장식품들을 둘러보며 놀라거나 혹은 못마땅해 하는 눈치다. 그때 마가렛이 다가와 고급 ‘커피’와 ‘위스키’를 내어준다.

영철이 마가렛의 집을 두 번째 방문한 장면에서는 대사가 더해진다. 마가렛은 영철에 대한 성애적 호의를 거의 일방적으로 피력한 뒤에 문득 “이 방안의 분위기, 매우 천하지요?”하고 알듯 모를 듯 자조적인 말을 던진다. 그때 영철이 “댁의 성함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둘 사이에는 아직 통성명도 없었다. 그때 마가렛이 “마가렛이요”하고 답하면, “마, 마가렛이라니?”하고 그녀의 서양식 이름에 영철이 놀란다. 그러면 마가렛이 태연하게 “저희들은 외인부대니까 본 이름은 없답니다”하고 답한다.

영철의 세 번째 방문에서 마가렛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처녀 시절에 그리던 꿈, 호화스러운 생활을 단념해 버릴 수는 없고, 그 반만이라도 목적을 달성하자면, 결국 이런 방면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에요. 모두가 단순한 허영이죠” 하고는 이제 직장에 나가야겠다며 영철이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전후에 ‘아프레 걸(Apres-girl)’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후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아프레게르(Apre’s-guerre)에서 온 말로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전후의 새로운 여성이라는 뜻이다. 주로 미국문화를 모방하며 방종하는 여성을 비판하기 위해 쓰였다. 여대생, 취업여성, ‘양공주’, ‘유한마담’ 등이었다”(‘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50년대’(창비) 72쪽). 하지만 비판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아프레 걸은 당대에 강력한 문화적 주술을 발휘한 것 같다. 많은 한국영화가 이들의 매력을 앞세워 관객을 유혹했다. 요컨대 마가렛이 아프레 걸의 전형이라고 할 때 그녀는 영철보다 시종일관 성격 면에서 개방적이고 성적으로 주도적이며 경제적으로 우세하여 더 입체적이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아프레 걸 마가렛이 북에서 온 공작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종결부에서 다시 일깨운다. 아프레 걸의 욕망이 전시되는 시간은 지났고 북한 공작원으로 맞아야 할 폐허의 비극적 시간이 남아 있다.

여기엔 쓰라린 시대적 정황이 또 하나 개입해 있다. ‘운명의 손’은 도시영화다. 도시는 아프레 걸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영화 내내 도시를 배경으로 하던 영화는 종결부에서 왜 산으로 가는가. 아니 정확히 말해 왜 산골짜기 깊은 동굴로 가는가. 전쟁 직후의 관객이 이 골짜기의 동굴을 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감정에 휩싸였을까.

‘골로 간다’는 말은 전후에 생겨났다. 전쟁 동안 골짜기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골짜기로 간다는 행위는 죽음을 뜻했다. 그러니 한국영화사상 첫 키스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일어날 때 당대의 관객은 육체적 쾌락과 역사적 공포를 오가며 이중의 전율을 느꼈을 것 같다.

■ 한형모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으로 스타 감독 반열


미술을 배운 한형모(사진·1917∼1999)는 백화점의 미술 간판 그리는 일을 했으며 감독 최인규를 통해 영화 미술계에 입문했다. 일본 도호 영화사에서 영화를 배우고 일본 기능 시험 중 촬영 분야에 합격했다. 최인규 윤용규 등의 작품을 촬영하며 촬영기사로 명성을 쌓았다. 데뷔작 ‘성벽을 뚫고’는 초창기 반공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전쟁 직후 ‘운명의 손’을 만들었으나 이규환 감독의 흥행작인 ‘춘향전’(1955)에 밀려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운명의 손’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다수 제작된 여간첩 영화의 시초가 되었다.

차기작 ‘자유부인’(1956)으로 마침내 스타 감독이 되었다. 정비석이 54년에 연재하여 큰 인기를 모은 동명 소설이 원작인데 영화 역시 초유의 관심을 끌었다. 대학 교수의 아내가 춤에 빠져 가정을 버렸다가 돌아와 뉘우친다는 내용이다. ‘자유부인’은 이규환의 ‘춘향전’과 함께 한국 영화의 산업적 흥행력을 대폭 확장시킨 영화로도 평가받는다. 영화의 서사 전개와 무관하게 춤과 노래가 벌어지는 무대 장면을 오래 보여주는 전시적 방식 등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활동했던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훗날 “지금 보기에는 뒤떨어져 보이지만 당시에 이 자체가 한국인의 생활의식에 가져온 변화가 거의 혁명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한국 초기 희극영화 중 한 편으로 평가 받는 ‘청춘쌍곡선’(1956)이 있다. 최초의 한국 탐정 스릴러 영화 ‘마인’(1957)도 연출했다. 대중성과 통속성을 두루 갖춘 한국장르 영화의 개척자로 통한다. ‘엘레지의 여왕’(1967)을 끝으로 은퇴했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필자 남다은·정한석은…

남다은
=1978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감정과 욕망의 시간: 영화를 살다’가 있다.

정한석=1974년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를 졸업했다. 2002년 ‘씨네21’ 영화평론상에 당선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영화기자로도 일했다. 저서로 영화 비평집 ‘성질과 상태-활동하는 영화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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