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 인간의 속죄에는 처벌뿐만 아니라 ‘사죄’가 필요하다

독일 전범재판이 열렸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 600호실의 풍경. 아래 사진은 1945년 11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출석한 나치 피고인들. 박양규 목사 제공, 국민일보DB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유대인 강제거주지역) 봉기 기념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모습. 국민일보DB
 
박양규 목사


제13문: 우리 스스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죄를 더 쌓아갈 뿐입니다.

제16문: 중보자는 왜 참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어야 합니까?

: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데, 죄인인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죗값을 대신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22문: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복음에서 약속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기독교 믿음의 항목으로 바로 ‘사도신경’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시리즈 1∼2회에서는 인간의 행복과 비참한 상태에 대해 살폈다. 이번 3회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3∼23문을 통해 왜 인간을 구원해 줄 중재자가 필요한지 다루고자 한다.

처벌과 사죄 없이 용서가 가능한가

독일 나치정권이 인류에 남긴 상처는 꽤 깊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나치의 패망으로 끝나고, 독일 뉘른베르크에서는 전범(戰犯) 재판이 열렸다.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한 이들에 대해 정의(正義)를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주도로 진행된 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은 영국인 제프리 로렌스(Geoffrey Lawrence) 대법관은 이렇게 말했다. “전범들에 대해 법적으로 가능한 판결은 세 가지다. 범죄자를 사면하거나 피해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되갚거나, 혹은 철저히 재판하는 방법이다.” 1급 나치전범 헤르만 괴링 등 24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괴링 등 12명은 교수형, 3명은 종신형, 4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재판 이후 사형이 집행됐다. 법을 통해 정의를 이룬 셈이다.

사실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전범 재판은 독일 스스로 진행했다. 그런 탓에 공정함을 기대할 수 없었고, 실제로 많은 전범이 처벌 없이 사면된 터였다. 이런 전례와 달리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철저하게 재판이 진행됐다. 도주한 자들은 수십 년 지난 후에도 끝까지 추적해서 재판에 넘겨졌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70년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지난날 독일이 자행한 범죄에 대해 무릎을 꿇고 사죄(謝罪)했다. 독일 의회는 전쟁 희생자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의했다. 앞서 로렌스 대법관이 ‘용서’라는 이름으로 전범을 사면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일 1차 세계대전 때처럼 재판이 진행되었다면, 공의(公義)는 붕괴되고 정의는 소멸됐을 것이다. 전범들에 의해 수많은 희생자가 존재했고, 그들의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죄를 처벌하는 것은 정의로 나아가는 필수과정이다. 이것이 수반될 때, 비로소 ‘용서’를 거론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도 피해자들의 고통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브란트 총리의 사죄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과거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미래의 용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죄에 대해 정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용서는 죄를 덮을 때가 아니라 정의가 행해진 후 일어나게 마련이다.

인간은 스스로 죄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 실존의 고통은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原罪)에서 기인한다. 이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성(罪性)에 물들었고, 이런 절망적 현실은 철학자들 사유의 소재가 되었다. 동서고금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기독교의 입장은 성악설에 가깝다. 죄로 인해 종교를 필요로 하는 상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비참한 인간의 상태가 절대자로부터 은총을 갈구하는 신앙의 본질이다. 죄와 무관한 기독교는 엄밀히 말하면 사교(邪敎)와 다를 바 없다. 개인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기독교의 이름을 빌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타 종교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여러 다른 종교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선(善)을 추구하고, 죄성을 억제하기 위해 금욕, 고행, 명상, 수련을 제시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런 인간의 상태를 비관하거나 연민에 빠지지 말고, 삶을 긍정하고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신을 몰아내자는 초인(超人) 사상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 죄성(罪性)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전범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과거의 범죄를 무효화할 수 없다. 범죄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기만이다. 아무리 선행(善行)을 쌓는다고 노력한들 과거의 범죄를 보상할 수 없다. 죄에 대한 재판과 처벌, 그에 대한 사죄가 있을 때 비로소 정의를 세울 수 있다. 죄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과 배상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구원에 이르는 신념의 표현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은 타 종교와 구별된다. 모든 사람이 죄로 물들었고(롬 3:23), 인간은 선행으로 죄를 없앨 수 없다(사 64:6). 그런 인생에 ‘죽음’이라는 처벌은 신의 공의(公義)를 유지하는 방법이다(롬 6:23).

만일 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거나 눈을 감는다면 그 신은 더 이상 정의로운 신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즉 인간이 받아야 할 처벌을 대신 받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 처벌받아야 하므로 그는 죄가 없어야 하는데, 그렇게 인간이 되어 신과 인간의 중재자(仲裁者)가 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히 9:15). 우리가 서야 할 재판의 자리에 그가 대신 섰고, 처벌을 받은 현장이 십자가다. 이런 사실을 믿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른다.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구원과 속죄의 실체를 신념체계로 표현한 것이 사도신경이다.

예수께서 인간을 대신해서 처벌받은 사건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비교할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사죄(赦罪)’다.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범죄에 대해 전범들은 처벌받았다. 브란트 총리는 사죄하고 배상을 약속했다. 이것이 범죄를 덮을 수 없지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과정이다.

예수와 세례 요한은 믿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죄’가 선행될 것을 강조했다. ‘회개하라’는 메시지였다. 죄에 대해 반드시 보상하고, 사죄해야 한다(눅 3:7∼14). 이것을 간과한 기독교의 복음은 ‘값싼 복음’이라고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경고했다.

지금 십자가와 하나님 은총을 외치는 한국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브란트 총리와 같이 사죄하는 마음, 과오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자세가 아닐까. 죄에 대해 무릎을 꿇는 것은 굴종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이며, 누군가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 나눔과 적용을 위해 생각해 볼 것은

☞ 독일과 일본이 전범에 대처하는 자세는 어떻게 다른가요?

☞ 한국교회나 크리스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글=박양규 목사

△서울 삼일교회 교육디렉터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2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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