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가족 사랑이 바다 같았던 기독 가정”… 문학으로 증거하다

대만 타이베이 ‘린위탕 하우스’ 뒤뜰에 아시아의 지성으로 불리는 린위탕이 잠들어 있다. 이곳은 작가가 평소 톈무 시내를 즐겨 바라보았던 장소였다. 왼쪽 작은 사진은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린위탕 흉상.
 
책상 위에 확대경과 린위탕이 발명한 '명쾌 타자기' 등이 놓인 서재.
 
부부가 사용한 소파가 놓인 거실.
 
부부의 사진이 놓인 소박한 침실.
 
‘린위탕 하우스’의 도서실.


“내 어린 시절에 영향을 크게 미친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곳의 산수(山水)였고, 둘째는 불가사의한 이상주의자 아버지였고, 셋째는 가족 간의 사랑이 바다와 같았던 기독교 가정이었다.”(린위탕의 자서전 ‘팔십자서(八十自敍)’ 중에서)

중국의 작가 린위탕(1895∼1976)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가족 모두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신앙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를 ‘불가사의한 이상주의자’로 표현하곤 했다. 당시 가정환경으로는 바랄 수 없는 것들을 꿈꿨기 때문이다. 결국 그대로 됐지만, 이를테면 아들이 상하이 세인트존스대학이나 미국 하버드대학 등에서 공부하길 바랐다. 목사인 아버지는 힘겹게 사는 사람들의 문제를 위해 앞장섰고, 성경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했다. 이런 환경은 분명 작가의 문학적 토양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린위탕은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모두 미션스쿨을 다녔다. 기독교에 대한 믿음과 열정은 청년시절 한때 사그러들긴 했지만 평생 신앙을 떠난 적은 없었다. 그는 저서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에서 “기독교 신앙을 따라 햇살 가득한 세상에 도달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세인트존스대학을 졸업한 후 청화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때, 영어를 가르치는 것 외에 자연스럽게 성경반을 맡았고, 성탄절 축하회 의장을 맡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부모의 권유로 상하이 세인트메리학교를 졸업한 랴오추이펑과 1919년 결혼했다. 슬하에 세 명의 딸을 두었다.

린위탕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그의 에세이들은 생활철학과 인생에 대한 체험을 재치 있게 피력했다. 그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에서 탈피해 어느 민족에나 공통된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했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그의 에세이를 궤 뚫고 있는 기본 테마이다. 가난과 절망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돈이 완전히 떨어지고, 아내의 물건까지 다 내다팔아 끼니조차 어렵게 됐을 때도 생활신념인 ‘서정철학’으로 이겨 나갔다. 서정철학이란 스스로 힘의 한계를 느끼지만 꾸준히 할 일을 하고,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절망 대신 운명을 개척할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다.

고택 정원에 잠들다

최근 대만 타이베이 양명산 중턱에 위치한 ‘린위탕 하우스’를 찾았다. 이곳은 린위탕이 말년에 10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낮에는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을, 저녁에는 석양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산을 볼 수 있으며, 밤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이 펼쳐진 야경을 구경할 수 있다. 린위탕의 서정철학이 담긴 수필집 ‘생활의 발견’을 보면 삶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 수 있어 흥미롭다. 그는 집의 내부 구조보다 집이 세워진 위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집을 선택할 때는 집의 내부 구조보다도 집 안에서 본 전망이 어떤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이 세워져 있는 위치와 주위의 경치가 중요한 것이다. 산 위에 모여 앉은 흰 구름이나 공중을 나는 새, 높은 벼랑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 새소리의 자연스러운 심포니 등 바라보이는 모든 경치는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고택 안 정갈한 정원의 징검다리가 방문객을 아시아의 지성으로 불리는 린위탕의 묘소 앞으로 이끌었다. 묘소 앞엔 평소 그가 즐겼던 차 한잔과 익소라 꽃 이 활짝 핀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만년에 언제 소멸될지 모르는 바람 앞의 다 타버린 촛불과 같은 인생의 막바지에 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두 딸이 살고 있던 홍콩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정원이 딸린 이 집에서 은거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71년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은 첫째 딸로 인해 작가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급격히 병약해졌다. 74년 대만 문화계가 열어 준 80세 생일파티 이후 외부생활을 사실상 마감하고, 76년 82세를 일기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만 그레이스침례교회에서 추모식이 진행됐으며 지인들은 그의 관에 성경을 함께 넣었다. 작가가 잠들어 있는 묘소는 평소 그가 톈무 시내를 즐겨 바라보았던 장소였다.

발가락 해방, 두뇌의 해방

린위탕은 동서양 문화를 흡수해 독특한 자기만의 사상을 구축한 작가다. 사상의 중심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애와 유머이다. 평생 50권 넘는 책을 번역하고 편찬했다. 작가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택 거실엔 그가 보았던 책들과 사용했던 책상, 의자, 소파 등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서재의 창가에는 둘째 딸 린타이이(林太乙)가 선물한 탁상 등과 확대경이 있고 청화 붓꽂이, 서류 집게, 타자기, 옥스퍼드 영어사전 등 문방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평소 린위탕은 이 창가에 앉아 창작에 몰두하기도 하고 독서도 했을 것이다. 손때 묻은 책들을 보며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은 없지만 읽어야 할 시기는 있다”고 한 작가의 말을 기억했다.

“세상엔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이란 없다. 있다면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하에 생의 어느 시기에 읽어야만 할 뿐이다. 나는 오히려 독서는 결혼처럼 운명이나 인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성서와 같은 종류의 책은 만인이 모두 읽어야 하지만 역시 읽어야 할 시기가 있다. 양서는 두 번 읽으면 얻는 바도 크거니와 재미 또한 새롭다.”(‘생활의 발견’ 중에서)

그는 소설가 산문가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어문학자이자 어휘학자였다. 책장엔 린위탕이 생의 최후 10년간 편집한 중국어·영어 사전 복사판과 친필원고와 저서, 도서들이 꽂혀 있다. 그는 다수 작품을 영어로 창작했는데 그중 ‘오국여오민(吾國與吾民)’ ‘생활의 발견(生活的藝術)’ ‘경화연운(京華煙雲)’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경화연운’은 4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랐다.

서재와 잇닿은 침실은 대체로 소박하고 편안해 보였다. 침대와 책상, 안경, 붓꽂이, 문진, 전화기 등이 놓여 있고 모퉁이에 가족사진과 아내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누워 생각에 잠겼을 작가를 떠올려봤다. 그는 잠자리에서 한 시간가량 조용히 있는 것이 사색가나 발명가, 사상가에게 매우 효과가 있다고 여겼다.

“파자마 하나만 입고 편히 침대 위에서 다리를 뻗거나 웅크릴 때야말로 정말 사업적 두뇌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발가락이 해방돼 있을 때만이 두뇌는 해방되고, 두뇌가 해방돼 있을 때만이 참된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편안한 상태로 있으면 어제의 성과와 과오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오늘 해야 할 계획 중에서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생활의 발견’ 중에서)

그는 서예와 그림, 전각까지 섭렵했다. 거실엔 그가 쓰고 그렸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주방 식탁 의자엔 새를 연상시키는 상형문자가 조각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린위탕이 그의 아내를 위해 직접 만든 심벌이다. 그는 가구마다 이 심벌을 직접 새겨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전시실엔 린위탕이 발명한 ‘명쾌 타자기’가 있었다. 그는 1920년 중국에 있을 때부터 중문 타자기를 발명하려고 고심했다. 한자는 획수도 많고 복잡했지만 26자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영문과 대응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쾌 타자기는 오랜 기간 많은 비용을 투자해 발명에 성공했지만 실용화되지 못해 그는 많은 빚을 지게 됐다. 타자기의 부속품이 비싼 데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바람에 타자기를 제조하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 린위탕

린위탕의 둘째 딸 린타이이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학 중문과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23년 동안 ‘리더스 다이제스트’ 중국어판인 ‘독자문적(讀者文摘)’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에세이 ‘나의 아버지 린위탕’에서 이렇게 아버지를 추모했다.

“아버지는 삶을 학문을 추구하는 끝없는 여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각국 철학자들의 학설을 폭넓게 탐구했다. 마치 탐험가처럼 고산준령을 쫓아 오르고 대양과 대하를 건너며 인생과 우주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이해를 하려고 애썼으며 자신의 사랑과 감정을 그대로 기록하곤 했다. 일에 열중해 있다가 틈을 내어 서재에서 나오는 그를 보면 꼭 세계일주에 나섰다가 창상지변(滄桑之變)의 파란곡절을 겪고 돌아온 이 같았다.”

또 그는 이 글을 통해 “작가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주위 사물에 대해 남들보다 더욱 깊은 감각과 깨달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던 부친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린위탕은 1936년부터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집도 사지 않았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는 친지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내게 미국 국적을 취득하라 권했지만, 이곳은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을 사지 않고 월세를 내며 살았다”고 했다.

그가 만년에 대만에 정착하게 된 것은 진한 민족의식, 향토애와 관계가 있다. 그는 대만에서 고향의 사투리를 듣는 것이 인생의 즐거운 일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평소 “선(善)은 곧 생명이며,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일종의 행복”이라고 강조해 왔다. 작은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지혜를 일깨워준 작가로 기억하고 싶다.

■ 12개 언어로 출간된 ‘생활의 발견’
소극적이거나 적극적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서 행복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슬픔, 괴로움,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한 상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극적인 행복도 있을 수 있으며, 우리들은 그러한 경우를 환희라고 부른다. 늘어지게 실컷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시면 폐가 부풀 대로 부푼다. 그러면 이어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싶어지고 가슴 근처의 피부와 근육에 유쾌한 운동 감각이 일어난다. 자아, 이젠 일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그러한 때”(‘생활의 발견’ 중에서)

문명비평가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한 몸에 흡수한 중국의 석학 린위탕이 1937년 ‘생활의 예술(The Importance of Living)’을 영문으로 출판하자 서구인들은 기상천외한 발상과 주도면밀한 이론 전개에 경탄했다. 놀라운 반응은 기하급수적으로 전 세계 지성인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이 책은 1938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12개 언어로 번역 출간 됐다. 국내에는 ‘생활의 발견’으로 출간됐다.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한 삶을 마칠 수 있는가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중국 여러 고전에서 끌어내 설명한다.

타이베이=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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