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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건강] ‘전자 눈’ 어둠에 빛을 전하다


 
3개월 전 인공망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회복 중인 김경란씨가 지난 21일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광고판을 보고 있다.
 
국내 1호 인공망막 이식 수술 환자 이화정씨가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시력재활 치료 일환으로 시력검사판을 읽고 있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김경란(56·여)씨는 서른다섯 살 때부터 앞을 전혀 보지 못했다. 진행성 유전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년 넘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았다.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타며 좋아하던 어린 딸(당시 4세)의 모습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이다.

한창 자라던 딸이 “엄마 이게 뭐예요?”라고 물어도 바로 답해 줄 수 없었다. “그게 어떤 모양인지 엄마한테 말해줄래”라고 되물어야 했다. 딸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무인지 가로등인지 알 수 있었다.

딸에게 동화책 한 줄 읽어주지 못했고 밥을 차려주기도 쉽지 않았던 힘든 시간들이 지났다. 딸은 고맙게도 의젓하게 자랐고 올해 스물네 살이 됐다.

암흑 속 삶에 ‘한줄기 빛’

암흑 속 삶을 살던 김씨에게 한줄기 빛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최근 국내 도입된 인공망막(아르구스2) 이식 수술을 받는 행운을 얻어 시력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이 수술은 시력이 없는 환자의 망막(카메라 필름에 해당)에 일종의 ‘전자 눈’ 장치를 심어 인공적인 시력을 만들어주는 방법이다(작동 원리 그림 참조).

지난 5월 말 서울아산병원 안과 윤영희 교수팀이 국내 처음으로 망막색소변성증 환자에게 시도해 성공했다. 김씨는 한 달쯤 뒤 이뤄진 두 번째 수술 환자다.

김씨는 “병을 진단받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전국에 이름난 안과는 다 찾아다녔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태어날 때는 시력이 정상이지만 이후 망막세포(시세포)가 망가지면서 조금씩 시력을 잃어가다 결국 실명하는 병이다. 김씨는 완전히 안 보이게 된 뒤부터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았다. 남편이 그녀의 손발이 돼 줬다.

올 초 의료진으로부터 5명에게 시행되는 인공망막 이식 수술 무료 임상시험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수술 후 3개월 가까이 지난 김씨는 낯선 세상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그녀는 25일 “처음엔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빛이 어색했고 낯설었지만 2주에 한 번씩 받는 시력 재활훈련을 통해 기억을 하나씩 되새기고 있다”고 했다. 시력 재활치료는 기존(시력 잃기 전)에 알고 있던 사물이나 일상에서 접하는 공간이 어떤 시각 패턴으로 뇌에 인식되는지 훈련하는 것으로 20여 차례 진행된다.

김씨는 안마사로 일하고 있다. 항상 남편 팔뚝을 잡고 거닐던 캄캄한 출퇴근길에 차가 움직이고 나무가 서 있고 지하철이 움직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씨는 “재활훈련을 받고 난 날이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자동차 모양은 어땠는지 가로등 불빛은 어떤 색이었는지 하나하나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4살 딸의 모습만 간직하고 있는 김씨에게 수술 후 성인이 된 딸의 얼굴 윤곽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윤영희 교수는 “인공망막 수술은 정상 시력이었다가 실명한 이들이 대상으로, 사물 형태와 명암 등 외부 영상 정보를 과거 기억과 조합해 인식하는 원리”라면서 “뇌인지 기능이 좋고 재활치료에 대한 의지가 클수록 시력 회복도 빠르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비슷한 처지의 망막색소변성증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하루 수십통씩 전화를 받는다. 그는 “더 열심히 재활해 그들에게 길잡이가 됐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

4개월 만에 시력판 세 번째 줄 읽어

망막색소변성증으로 10년 전 실명한 뒤 얼마 전 국내 1호 인공망막 이식 수술을 받은 이화정(54·서울 동대문구)씨의 삶도 많이 바뀌고 있다. 수술 후 한 달이 지나자 시력검사판의 가장 큰 글씨를 읽을 정도가 됐다. 그 무렵 국내 언론에도 소개돼 큰 관심을 받았다. 4개월여가 지난 현재는 시력검사판의 세 번째 줄까지 구분 가능하고 ‘탕수육’ ‘수박’ 같은 단어를 천천히 읽게 됐다. 화이트보드에 글씨도 쓸 수 있다.

예전에는 소리에 의해 차가 오는 걸 알았다면 지금은 소리 외에 눈에 들어오는 빛으로 여러 정보를 얻는다. 외출할 때 항상 뒤따라 움직이며 ‘차가 온다’ ‘앞에 장애물이 있다’고 알려주던 가족들을 떼어놓고 1∼2주 전부터는 혼자 움직이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이씨는 “사람을 만나도 머리를 묶었는지 짧게 잘랐는지, 손이 움직이는지 파악할 수 있고 아스팔트와 차도를 구분하는 흰색 선도 보인다. 햇빛이 강한 날은 더 선명히 볼 수 있다”며 활짝 웃었다.

윤 교수는 최근 이씨 수술 후 시력 회복 과정을 미국 학회에서 사례로 발표했다. 유난히 회복 속도가 빠르고 결과가 좋아 해외 의료진의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고 한다. 윤 교수는 “1년여간 준비했고 수술도 완벽히 이뤄져 여러모로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이씨의 경우 수술 전 시야 각도가 2도였는데 지금은 30도 정도로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위암 말기로 투병하던 이씨의 남편은 이달 초 각막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수술 받기까지 남편의 지지가 컸다. 마지막 떠날 때 남긴 ‘나 없이 혼자라도 잘 보고 다녀’라는 말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다. 앞을 못 보는 나를 보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눈을 나눠주고 싶었던 모양”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씨는 앞으로 잘 보게 되면 딸(30)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날 꿈에 부풀어 있다. 그는 “시력을 잃기 전 책에서 그림이나 사진으로 봤던 안토니 가우디의 멋진 건축물과 오래된 성당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딸이 결혼하면 식장에 누군가의 부축 없이 들어가 단상 위 화촉을 밝히는 소망도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인공망막 이식, 시력 되찾는 유일한 치료법

망막색소변성증은 4000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희귀·난치병이다. 국내에 약 1만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상당수는 병원을 찾지 않기 때문에 환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본적 치료법은 아직 없다. 망가지지 않은 망막세포를 계속 유지하는 치료로 시력 감소를 늦출 수 있을 뿐이다.

몇몇 연구에서 비타민 A·E가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고 오메가3 지방산, 루테인 등 항산화제가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일각에서 줄기세포나 유전자 치료로 손상된 망막세포를 대체하는 임상연구가 진행 중이나 환자에게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현재로선 인공망막 이식이 유일한 시력 회복 방법이다. 최근 미국 대학 연구팀이 아르구스2인공망막 장치와 비슷한 원리의 칩을 뇌에 직접 이식하는 방법을 개발해 식품의약국(FDA)의 임상시험 승인을 받았다. 이 방법은 당뇨병 녹내장 등 질병과 사고로 실명한 환자들에게도 적용 가능해 범용 ‘전자 눈’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효과와 안전성이 검증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신의료기술 평가로 건강보험 적용 시급

국내 첫 인공망막 이식 수술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윤 교수팀에게는 전국에서 문의가 쇄도했다. 망막색소변성증 외에 여러 이유로 시력을 잃은 환자와 가족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선 망막색소변성증에만 허가받은 상황이다.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실명했더라도 당뇨 망막증, 황반부종, 망막박리 등 다른 눈 질환이 합병돼 있으면 망막 내부 기능이 손상돼 수술 대상이 될 수 없다.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상실해 2008년부터 혼자 걷는 게 불가능해진 김상수(64)씨는 언론 보도를 본 딸의 권유로 의료진에게 신청해 세 번째 수술 대상자로 선정됐다. 김씨는 “통보받고 너무나 감격스러워 펑펑 울었다”고 했다. 지난 15일 무사히 수술을 마친 그는 “아들의 눈이 안 보이는 걸 가슴에 사무쳐하다 지난해 말 돌아가신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반면 같은 병으로 10여년 전 실명한 A씨(62)는 황반부종이 동반돼 수술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윤 교수는 “전국의 망막색소변성증 환자 가운데 3분의 1가량은 상담을 받으러 온 것 같다. 다만 국내 추정 환자 1만여명 가운데 수술 기준에 부합한 인원은 500명 안팎일 것”이라고 말했다.

수술 대상이 되더라도 남는 문제가 고가의 비용이다. 인공망막 장비 값만 1억8000만원에 수술 전후 검사, 시각 재활 비용 등을 합치면 2억∼2억5000만원이 든다. 5명에 대한 무료 임상시험 비용(약 10억원)은 병원 후원기금 등을 통해 지원받았다.

이 때문에 의료진은 신의료기술 평가를 통해 인공망막 이식에도 하루빨리 건강보험이 적용되길 기대하고 있다.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건강보험 산정특례(본인부담 10%) 대상이 되면 2000만∼2500만원만 부담하면 혜택을 볼 수 있다.

글·사진=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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