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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건강] 바리스타 교육하는 정신병원

박종익 국립춘천병원장(맨 왼쪽)과 안소영 정신재활치료과 계장(맨 오른쪽)이 정신질환자 사회복귀를 위한 공동생활가정 ‘두빛나래’ 앞에서 입소자들과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다.
 
두빛나래 입소자들이 병원내에 설치된 직업재활시설 카페 누림마루에서 바리스타로부터 커피 제조법을 배우고 있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카페 누림마루 외관.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홍천과 춘천을 잇는 5번 국도변에 국립춘천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정신병원이다. 병원 출입구에 최근 테이크아웃 커피 모양의 큼지막한 입간판이 생겼다. ‘카페 누림마루’ 개소를 알리는 광고다. 화살표로 방향을 알리고 있어 외부 손님을 끌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한적한 시골 정신병원에 웬 커피숍일까.

정신병원에 커피숍?

지난 12일 찾은 병원 건물 왼편에 새로 지어진 예쁜 카페가 한눈에 들어왔다. 외벽에 ‘너는 커피를 좋아하고 나는 그런 너를 좋아하고…’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33㎡(10평) 남짓한 카페 건물 안에 들어서니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줬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직원들의 말투가 조금 어눌했다. 조현병(옛 정신분열병)과 우울장애, 공황·불안장애 등을 앓고 있는 중증 정신질환자들이었다.

바리스타 김동욱(46)씨가 이들에게 커피 내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원두는 0.3㎜ 이하로 세밀하게 갈아야 합니다. 원두의 양이 많고 적음에 따라 에스프레소 빛깔이 달라져요.”

환자 중 한 명이 주문을 받았고 이어 커피 만들기가 시작됐다. 조현병 환자인 김현식(가명·50)씨가 포터필터에 원두 가루를 넣고 탬퍼로 꾹꾹 누르는 작업을 직접 해 보겠다고 나섰다. 손동작이 맘대로 잘 따라주지 않았다. 우울장애를 오래 앓아 온 김형범(가명·46)씨가 나서진 못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김동욱씨는 “정신질환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사람 대하는 거예요. 자꾸 만나면서 이겨내는 훈련이 필요하죠”라고 했다.

그는 “일반 장애인에게 바리스타 교육을 한 적은 있지만 정신장애인은 처음”이라며 “자격증을 따서 한 사람의 기능인으로 자신감을 갖고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난 15일 공식 문을 연 카페 누림마루는 정신질환자 직업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꾸려졌다. 오랫동안 정신병동에 입원해 세상과 단절됐던 정신질환자들이 사회에서 걸음마를 시작하는 곳이다.

2015년 취임한 박종익(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원장이 아이디어를 내 2년 준비 끝에 결실을 맺었다.

“지역민에게 정신병원을 개방키로 했다”는 박 원장은 “편견을 버리고 많이들 와서 커피를 마셔주면 환자들의 재활과 자립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국립정신병원 최초 사회복귀시설

카페 누림마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신질환자 공동 생활시설 ‘두빛나래’가 있다. 치료를 끝내고 퇴원한 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환자들이 함께 거주하며 재활과 직업훈련을 받고 사회복귀를 준비하는 시설이다. 두빛나래는 ‘두 개의 빛나는 날갯짓’이란 뜻이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환자가 지역사회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립춘천병원은 사회복귀시설을 직접 설치·운영키로 했다. 복지부 산하 5개 국립정신병원 가운데 최초의 시도다. 국립병원이 정신질환자의 입원 치료부터 퇴원 후 재활과 자립까지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국고 보조 대상이었던 정신질환자 사회복귀시설은 2004년 7월부터 지방자치단체로 이양돼 지자체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 원장은 그러나 기획재정부를 찾아다니며 국가 차원의 사회복귀시설 모델 필요성을 설득한 끝에 두 차례 2억원 남짓한 나라예산을 따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 직원 기숙사 일부를 두빛나래로 리모델링했다.

박 원장은 “정신질환자들이 병동 밖으로 나와 일상 속으로 첫발을 내딛도록 주거시설과 일자리 지원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훈련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통합 재활 프로젝트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병원과 지역사회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얘기다. 박 원장은 “다른 국립정신병원과 민간 의료기관에도 이 모델이 확산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정신질환자 사회복귀시설은 지난해 말 기준 전국에 336개가 있으며 수용 인원은 7000여명에 불과하다. 서비스 필요 대상자의 1.4%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다. 이 중 거주 가능한 생활시설은 140곳이다. 우리나라 인구 10만명당 거주 서비스 정원은 3.65명에 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이탈리아 46.4명, 오스트리아 30.0명, 미국 22.2명, 일본 16.2명에 비해 최하위 수준이다. 취업 등과 연계되는 직업재활시설도 11곳뿐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정신질환자 시설을 지역민들이 반기지 않기 때문에 지자체들이 시설 투자를 꺼리고 복지 서비스를 늘린다 하더라도 정신장애인 지원은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역별 편차도 커서 서울과 경기도를 제외한 지역은 사회복귀시설이 더욱 열악하다. 박 원장은 “정신질환자의 지역사회 서비스를 지자체가 떠맡는 현 구조는 정신병원 장기 입원을 조장할 소지가 있다. 국비 지원으로 운영되는 형태가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거-직업재활 시설 늘어야

6명이 정원인 두빛나래에 지난달부터 3명의 정신질환자가 잇따라 입소했다. 1명은 추석 연휴가 끝나고 들어올 예정이다. 대기자 4명에 대해선 심사가 진행 중이다. 소문을 듣고 서울과 경기도 등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왔다. 조현병, 우울·불안장애, 조울병(양극성장애) 등 중증 정신질환으로 치료 중이며 자해·타해 위험성이 없어야 입소 가능하다. 이들은 밥하기, 빨래하기 같은 일상생활 능력을 기르고 대인관계, 의사소통 기술을 배워 사회 적응력을 키운다.

국립춘천병원 정신재활치료과 안소영 계장은 “무엇보다 병원 기반의 사회복귀시설이라 갑자기 정신 이상 증상이 나타나도 바로 치료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 본인과 보호자 모두 안심한다”고 말했다. 입소 비용은 월 25만원으로 민간 시설(30만∼40만원)보다 싼 편이다. 다만 민간시설과 달리 이곳에서는 최대 18개월까지만 머무를 수 있다.

안 계장은 “계속 있으면 시설에 안주하게 돼 자립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직업훈련을 받은 뒤 사회에 진출, 독립생활을 하도록 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전했다. 입소자들은 며칠 전부터 누림마루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자격증을 따서 정식 취업하면 시급을 받게 된다.

12살 때 발병한 김형범씨는 여러 정신병원을 돌아다니며 입퇴원을 반복했다. 두빛나래 입소 전에도 2년간 정신병동에 입원했었다. 김씨는 “부모님 돌아가신 뒤 퇴원하면 형님 집에 머물렀는데, 형님이 생계를 위해 집을 비울 때는 혼자 약을 챙겨먹지 못해 증상이 재발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면서 “지금은 의료진이 있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꼭 해보고 싶은 바리스타 일을 배우고 있어 안심이 되고 기대도 된다”고 말했다.

공황·강박장애로 오랜 입원 치료를 받아온 김수현(가명·26)씨도 “퇴원 후 반겨주는 사람 없는 차가운 세상에 곧바로 던져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복귀시설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고 말했다.

조현병의 경우 환청 망상 등 증상은 약물로 충분히 조절 가능하다. 하지만 의욕이 떨어지거나 감정 표현이 어렵고 활동이 위축되는 증상은 병원생활이 오래되면 약물 치료만으론 해결이 안 된다. 지역사회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재활해야 나아진다. 병원에 오래 있으면 만성화되고 결국 시설증후군에 빠질 위험도 크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자해·타해 위험이 없는 정신질환자들은 퇴원을 유도해 지역사회에서 재활이 이뤄지도록 하는 내용의 정신건강복지법이 지난 5월 30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국립춘천병원 장광호 정신재활치료과장은 “그동안 정신질환자는 사회복귀나 재활보다 입원 치료, 수용에 초점을 맞춰온 게 사실”이라며 “환자 가족들도 수차례 입원하다 보면 환자 거주 공간을 없애고 병원에 방을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신건강복지법 시행으로 입원 위주에서 사회복귀 위주로 정신건강 정책의 패러다임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장 과장은 “문제는 퇴원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거나 돌봐줄 가족이 없으면 또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게 10년 넘게 입원하기도 한다”면서 “정신건강복지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려면 주거와 함께 직업재활까지 가능한 사회복귀 시설이 많이 확충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익 원장은 “현재는 남성들만 들어올 수 있는데, 여성 환자들의 입소 문의도 적지 않아 향후 여성을 위한 시설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 “두빛나래가 잘 정착되면 궁극적으로는 병원 바깥에 ‘중간집(halfway house)’ 형태의 독립생활 거주지를 마련해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춘천=글·사진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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