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헬조선 탈출 전말기


 
2005년 재외동포재단과 단국대 아시아아메리카문제연구소가 주최한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 사진전’에 내걸린 사진이다. 20세기 초반, 조선을 떠나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들이 고된 노동을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멕시코 혁명의 주역인 비야(앞줄 왼쪽)다. ‘검은 꽃’의 주인공 김이정은 비야가 이끄는 혁명군에 가담해 3년을 보낸다. 한국국제교류재단·필자 제공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이다. 100여년 전,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들은 에네켄 농장 30여곳에 뿔뿔이 흩어져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필자 제공
 
소설가 김영하


2000년대는 새로운 역사소설이 흥성했던 시기다. 이전의 역사소설이 대개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역사를 진지하고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었다면, 이 시기의 역사소설은 그와 다르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큰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운명과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작은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기보다 역사를 상상과 판타지를 통해 새롭게 재구성하는 ‘팩션’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TV 드라마로 방영됐던 ‘다모’(2003)와 ‘대장금’(2004)이 그 좋은 사례다. 2000년대의 많은 역사소설은 그렇게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중심에 놓는 ‘큰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거부하고 제각기 역사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이나 소수자의 운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영하의 역사소설 ‘검은 꽃’은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 있는 소설이다.

1905년 4월 4일, 새로운 꿈을 찾아 고국을 버린 1033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영국 기선 일포드호에 몸을 싣고 멕시코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다. 가난한 황족, 몰락한 양반, 도시 부랑자, 파계한 신부, 굶주린 대한제국 군인 등 그들은 신분도 처지도 다르지만 하나만은 같았다. 그들은 모두 무능하고 부조리한 구한말 조선의 폭압적 현실을 견디지 못해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조선을 떠나려고 한다. 멕시코로 가는 도중 배에 이질이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의지는 한결같다.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그렇게 그들은 다짐한다.

이들의 여정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헬조선 탈출의 여정이다. 그렇다면 헬조선을 벗어난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미지의 세계로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그들의 탈출과 꿈의 좌절을 좇아가는 역사소설이다.

이 소설의 시작은 이상하다. 주인공 김이정이 죽어가는 모습이 소설의 서두에 제시된다. 김이정은 늪에 고개를 처박고 죽어가고 있다. 감은 그의 눈에 멕시코로 떠나기 전 제물포항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환하게 몰려든다.

물풀들로 흐느적거리는 늪에 고개를 처박은 이정의 눈앞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제물포의 풍경이었다. 사라진 것은 없었다. 피리 부는 내시와 도망 중인 신부, 옹니박이 박수무당, 노루 피 냄새의 소녀, 가난한 황족과 굶주린 제대 군인, 혁명가의 이발사까지, 모든 이들이 환한 얼굴로 제물포 언덕의 일본식 건물 앞에 모여 이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이토록 선명할까. 이정은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의 폐 속으로 더러운 물과 플랑크톤이 밀려들어왔다. 군홧발이 목덜미를 눌러 그의 머리를 늪 바닥 깊숙이 처박았다.

이 짤막한 서두가 있은 뒤에야, 제물포항에서 출항을 기다리는 장면이 시작된다. 즉 소설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죽은 다음에 시작되고, 소설 전체는 죽은 자의 눈으로 돌아보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런 설명 없이 처음에 돌연 등장하는 이 죽음의 장면은 소설을 끝까지 읽은 뒤에야 비로소 의미가 파악된다. 이 장면은 주인공 김이정이 과테말라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는 결말 부분이다. 도시 부랑자로 떠돌던 김이정이 멕시코행 일포드 호에 승선한 건 새로운 삶에 대한 충동 때문이었다. 멕시코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뒤에 가까스로 그가 도달한 곳은 바로 죽음으로 가득한 늪지대다. 작가는 이 죽음의 상황을 도입부에 배치함으로써 소설 전체를 죽음의 이미지로 감싼다. 늪에 고개를 처박힌 김이정은 눈을 감은 짧은 순간에 그동안 잊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멕시코라는 “먼 곳으로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의 혹독한 노동과 죽음을 견딘 다음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져서 살아남거나 죽었다. ‘검은 꽃’은 그 흔적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떠나온 나라가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가”듯이 그렇게 역사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의 이야기. 새로운 정처를 찾아 떠났지만 결국 정처 없이 떠돌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자였지만 난민이 되고 만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점에서 ‘검은 꽃’은 죽어가는 자의 플래시백(flash-back)으로 역사 속에서 잊힌 존재들을 불러들이는 초혼(招魂)의 서사다.

‘검은 꽃’은 겉으론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떠난 한인 이주민의 역사를 좇아가지만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근대적 성공담 따위는 애초에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른 역사소설에서라면 으레 성공담의 주인공이 될 법한 김이정의 운명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소설은 직선적인 발전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김이정은 “고아로 자라났으나 주눅 들지 않았”으며 “남달리 이해력이 좋은 영민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남다른 특별함 때문에 남의 나라에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익명의 무국적 아나키스트로 생을 마감한다. 멕시코로 떠나는 배 안에서 김이정과 만나 신분의 격차를 넘어 사랑에 빠진 이연수는 또 어떤가. 그녀는 왕족으로서의 “타고난 귀티와 남다른 오만함”은 물론 “남자처럼 공부하고 직업을 얻고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는 꿈”을 지녔던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한 채 남자들에게 팔려 다니다가 멕시코 암흑가에서 매춘업과 고리대금업을 하다 늙어 죽는다. 그 과정에서 김이정과 이연수의 순수하면서도 격정적인 로맨스는 짓밟히다가 결국에는 해체된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개인의 운명은 철저하게 뒤집히고 뒤틀린다. 지배자의 탐욕과 참담한 노동착취, 부패하고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견디지 못해 헬조선을 탈출한 사람들은 도처에서 지옥을 보게 된다. 그들이 타고 온 일포드 호의 선실부터가 지옥이다. 그곳은 “고약한 냄새” “욕설과 한탄, 비난과 주먹다짐”이 난무하는 곳이며 그래서 차라리 “신화 속 괴물의 내장 같은” 곳이다. 그들이 마침내 도착한 멕시코 에네켄 농장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곳 또한 기아와 살육, 탐욕과 강간이 반복되는 ‘괴물의 내장’에 불과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돈 없고 ‘빽’ 없는, 심지어 나라까지 없는 백성들에게 헬조선은 도처에 있었다. 모든 곳이 지옥이다.

결국 ‘검은 꽃’에서 이민들이 사로잡히는 “멕시코라는 나라에 대한 단꿈”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허황하고 허망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작가에 따르면 국가 또한 다르지 않다. “국가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그런데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 속 많은 인물들, 특히 남성들은 국가의 무능과 적폐를 비난하면서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 혹은 미혹에 사로잡힌다. 몰락한 왕족 이종도는 물론이고 “1960년대 박정희 소장에 의해 현실화된 군사정권”에 가까운 ‘숭무(崇武)의 사상’에 사로잡힌 대한제국 군인 출신 조장윤, 조국을 떠나면서 비로소 이름 석 자를 갖게 된 무국적주의자 김이정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가 꿈꿨던 것은 그들이 떠나왔던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그러나 이런 식의 ‘나라 만들기’의 꿈은 역사에 휩쓸려 소멸해간 씁쓸한 소극(笑劇)에 그치고 만다.

좋아, 그렇다고 쳐. 나라가 있든 없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이정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있든 없든 상관없다면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하나쯤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중략)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김이정에 따르면 국가란 있든 없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면 국가는 필요하다. 산 자를 위한 국가가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국가. 다시 말하면 국가란 산 자에겐 실제로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검은 꽃’은 “그러나 그곳을 거쳐 간 일단의 용병들과 그들이 세운 작고 초라한 나라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죽은 자들을 위한 국가는 결국 죽은 자에게도 별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들은 모두 그렇게 지워진다.

2000년대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정당성과 자명함이 의심받기 시작한 시대다. 개인의 정체성을 보증해주는 국가와 민족의 필요와 정당성을 의심하고 냉소하는 ‘검은 꽃’은 그러한 탈근대적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소설이다. 먼 곳을 향해 떠난 사람들이 처음 품었던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 발전에 대한 기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노력 등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우연한 계기로 흩어지고 구부러진다. 역사적 필연성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도 이 허망한 시간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역사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상은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세상은 항상 개인의 진의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그것을 배반하면서 굴러간다. ‘검은 꽃’에서 작가 김영하가 도달한 지점은 바로 이러한 삶의 우연성과 불가항력이 아니었을까? 결국 개인의 운명은 민족과 국가의 운명과는 무관하게 우연의 굴곡을 따라 흘러갈 뿐이다. 소설의 제목 ‘검은 꽃’은 우연히 역사의 급류에 휘말렸지만 다시 역사 바깥으로 밀려나 죽은, 그리고 망각된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조화(弔花)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김영하… 2004년 ‘문학계 그랜드슬램’ 달성한 작가

김영하(49)는 1995년 단편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을 계간 ‘리뷰’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지만 그 다음 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판타지 컬트 포르노그래피 등과 같은 B급 장르와 난해하고 심오한 현대 예술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타인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자살안내인을 통해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가벼우면서도 명쾌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대중문화적 상상력은 소설집 ‘호출’(1997)과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1999)에서 좀 더 확장된다.

이후 작가는 아랑 전설을 현대적으로 차용하면서도 작가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와 새로운 감수성, 형식적 실험이 도드라진 추리소설 ‘아랑은 왜’(2001)와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검은 꽃’(2003)을 발간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된다. 특히 ‘검은 꽃’은 2004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데, 작가는 그해에만 동인문학상을 비롯해서 이산문학상(단편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 황순원문학상(단편소설 ‘보물선’)을 수상하면서 “문학계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예외적인 작가가 된다.

200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2007년 그만 두면서 지금까지 전업 작가로 산다. 이후 갑자기 귀환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의 하루를 그리스비극의 형식으로 그려낸 ‘빛의 제국’(2006), 20대 청년 백수의 삶을 다룬 ‘퀴즈쇼’(2007),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분열적 심리를 따라가는 ‘살인자의 기억법’(2013) 등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심진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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