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진리는 삼천포에 있다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식. 선수 명단에는 국가대표 출신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고, 실업팀에서 주전으로 뛴 선수도 거의 없었다. 15승 65패, 승률 1할 8푼 8리의 전설적인 꼴찌팀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로고. 삼미는 '슈퍼스타 없는 슈퍼스타즈'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1997년 12월 3일 구제금융 합의안에 서명하는 당시 임창렬 경제부총리(가운데)와 미셀 캉드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왼쪽). IMF 외환위기는 '나'가 프로의 세계를 벗어나 자기만의 야구를 즐기는 계기가 된다. 필자 제공
 
박민규


2000년대 초반, 어느 날 이상한 소설가가 나타났다. 어수선한 머리에 지저분한 콧수염을 하고 커다란 고글을 쓴, 용모 단정과 아예 담을 쌓은 듯한 그는 자기를 '무규칙 이종소설가'로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과연 그의 파격적인 용모답게 소설도 엉뚱함과 재기발랄로 넘쳐났다. 각종 대중문화 아이콘들을 소설 안에 끌어들이고 천방지축 유희하며 미끄러져가는 그의 소설은 '이런 것도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엉뚱하고 파격적이었다. 그의 소설이 보여준 재치 있고 활달한 화술과 기발한 상상력은 빠른 시간 안에 적지 않은 대중독자들을 그의 곁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그 소설가가 바로 박민규다.

박민규의 소설은 문학 바깥의 온갖 잡스럽고 이질적인 것들을 소설 안으로 끌고 들어와 소설의 익숙한 규범을 교란했다. 그것은 기존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넓혀가는 실험이었다. 그의 소설은 만화와 무협지, 인터넷과 게임 같은 엉뚱한 비문학적 요소들의 유희적 도입이 어떻게 문학적 체험의 확장과 갱신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2003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마지막 팬클럽’)은 그런 박민규의 문학세계가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지리라는 걸 예고한 소설이다.

‘마지막 팬클럽’은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 회원이었던 ‘나’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은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아이였던 ‘나’가 삶의 시련과 방황과 좌절을 겪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다소 뻔하고 상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이 단순한 성장소설의 얼개에 기발한 유머와 종횡무진 뻗어나가는 활달한 입담으로 흥미진진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소설은 프로의 세계와 아마추어의 세계를 대비하면서 전개된다.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 “바야흐로, 프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장되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아마와 프로 사이의 38선”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세상은 프로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프로야구는 이 ‘프로의 세계’의 상징이었다. ‘나’는 말한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나’는 삼미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하며 프로야구에 빠져든다. 하지만 ‘나’는 곧 실망하고 좌절한다. 문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에 있었다.

프로야구 원년. 우리의 슈퍼스타즈는 마치 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패배의 화신과도 같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고, 2연전을 했으니 하루를 푹 쉬고, 그 다음 날도 지는 것이다. 또 다르게는 일관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용의주도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주도면밀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쉽게 말하면 거의 진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원년 15승 65패로 승률 1할 8푼 8리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세웠고 85년에는 18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팀이다. 삼미를 응원하던 ‘나’의 열광과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뀐다. 삼미의 야구는 어처구니없는 패배로 점철되었다. ‘나’가 보기에 그것은 야구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패배였고 “우주의 역행과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는, 그런 느낌의 패배”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심지어 삼미와 싸우는 상대팀을 원망할 정도다. “나는 생각했다. 한 민족끼리 이래도 된단 말인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삼미의 야구를 열심히 응원하다 좌절한 ‘나’는 세상의 쓰라린 진실을 깨닫는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라는 것을. 이후 ‘나’는 심기일전해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대기업에 입사하는 등 본격적인 경쟁의 세계에 뛰어든다. 하지만 ‘나’를 기다린 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의 여파로 인한 구조조정과 아내의 이혼 통보였다.

무자비한 경쟁의 세계에 지치고 환멸을 느낀 ‘나’는 어린 시절 같은 팬클럽 회원이었던 친구 조성훈을 만나 삶의 방향을 전환한다. 생각의 전환도 뒤따른다. “지면 어때?” 그들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결성하고 프로의 세계에서 탈락한 패배자들을 모아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를 재현하기로 한다. 이기기 위한 야구가 아니라 아름답고 행복한 ‘진짜’ 야구를.

‘마지막 팬클럽’은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무한경쟁의 삶에 순응하고 적응하기를 사양하는 탈(脫)자본 교양소설이다. ‘나’가 결국 거부하는 것은 프로의 세계 곧 자본주의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이다. 작가는 그 프로의 세계를 미국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라고 요약한다. 작가에 따르면 프로야구의 출범으로 활성화된 ‘프로의 세계’는 자본과 국가권력이 국민을 고단한 자본주의적 경쟁으로 몰아넣기 위해 고안하고 치장한 그럴 듯한 선전구호에 불과하다. 작가는 프로가 되길 권장하는 세상의 구호들 이면에 숨은 진실을 냉소와 유머를 섞어가며 곳곳에서 발설한다. 가령,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마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활화 고착을 목표로 한 프로복음 9호 되겠다. 이후 아마추어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회적 무의식과 야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기업 풍토가 널리 확산된다.

같은 식이다.

소설은 그런 무한경쟁의 세계(프로의 세계)에서 “지면 어때”라고 생각하는 ‘아마의 세계’로 역행하는 ‘나’의 선택을 그린다.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라는 조성훈의 충고도 몫을 보탰다. “전부가 속았던 거야.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겐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 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 ‘나’의 선택은 이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경쟁의 유혹에 속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 진짜 자기의 삶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마지막 팬클럽’을 이끌어가는 것은 시종 종횡무진 가지를 뻗어나가는 능청스런 유머와 농담, 엉뚱하고 황당한 허풍과 언어유희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의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들려주는 유머와 농담의 이면에는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생존의 공포와 승자독식 무한경쟁에 짓눌린 평범한 개인의 삶의 피로와 비애가 무겁게 깔려 있다.

소설은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 루저(loser)로 전락한 ‘나’의 의식을 통해 지금 우리 삶이 떠안고 있는 불안과 허무와 상실감, 승자독식 무한경쟁의 강요에 짓눌린 삶의 불안과 고통을 환기한다. 때로는 딴전 피우며 때로는 유머와 농담으로 능청스럽게 비껴가면서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괴물 같은 현실에서 아무 것도 기댈 것 없는 나약하고 무력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태도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는가?

벤처사업을 해보자는 제의를 뿌리치고 야구를 하기로 했다는 ‘나’에게 선배는 말한다. “자식, 잘 나간다 싶더니 삼천포로 빠졌구나.” ‘나’가 선택한 삶의 태도는 바로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다. 즉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목적을 향해 한길로 내달리는 삶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달리기’보다 ‘어떻게’ 달려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삼천포에서 진짜 인생을 발견한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된다. 무한경쟁의 강요에 휘둘려 앞뒤 돌아보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왔던 그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지구다.” ‘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충만함을, 소중한 자기의 가치를 발견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삶을 잠식한 자본의 지배 그 자체에 도전하기보다 그로 인한 상처를 최소화하고 자아를 보존하는 일종의 우회적인 적응의 방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팬클럽’의 ‘나’의 선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기획한 제도적 삶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그와 전혀 다른 자리에서 나름의 삶의 기획을 창안하고 향유하는 탈자본적 대중의식의 중요한 징표다. 그리고 형식과 규범, 중심과 권위를 부정하고 주어진 궤도를 이탈해 몸 가볍게 유희하는 박민규의 소설도 바로 그렇다. 박민규의 소설은 삼천포에 있다.

<김영찬 문학평론가>

■ 박민규는 엉뚱하고 파괴적, 기발한 상상력… 자칭 '무규칙 異種소설가'

소설가 박민규(49·사진)는 2003년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 작가상을 받으면 등단했고 그해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스타작가로 급부상했다. 박민규의 출현은 "대한민국 문학사상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회자됐다.

이후 소설집 '카스테라'로 가벼운 형식실험 안에 한없이 무거운 이야기를 녹여내거나 서로 다른 사건, 인물들을 느닷없이 이어 붙여 황당하지만 설득력 있는 서사를 만들어내는 박민규식 소설문법(김영하에 따르면 '뺏고 싶은 문장'으로 이루어진)을 완성한다. 자칭 "무규칙 이종소설가"답게 작가의 상상력은 국내와 국외, 지구와 우주, B급 문화와 생(生)에 대한 실존적 탐색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종횡무진한다. 작가는 이 작품집으로 2005년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한다.

이듬해 출간된 장편소설 '핑퐁'(2006)은 학교폭력을 소재로 '왕따'의 정치학을 우주론적 관점에서 다루었다. 박민규의 소설은 삶에 대한 극단적인 권태와 피로를 바탕에 두면서도 가볍게 잽(Jap)을 날리는 위트와 유머로 무거운 현실에 가볍게 저항한다. 2007년에는 단편소설 '누런 강 배 한 척'으로 이효석문학상을, 2009년에는 단편소설 '근처'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0년에는 단편소설 '아침의 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누런 강 배 한 척'은 노인 화자를 통해 이전과는 달리 원숙하면서도 진지한 시선으로 생의 무게를 가늠해 봄으로써 박민규 작가가 단순히 가볍고 경쾌한 믿거나 말거나식 장광설에만 머무르지 않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임을 입증했다. 그 외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2009)와 소설집 '더블'(201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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