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를 바꾼 성경 속 여인들] 민족을 구한 여인의 지혜와 용기, 성경에 실리다

①왕후 에스더(흰옷 입은 이)와 아하수에로왕이 만나는 장면. 에스더가 금규(왕의지팡이)를 내민 왕을 향해 자신이 베푼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석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②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오른쪽)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는 계책을 꾸민 하만(가운데)을 고발하는 모습. 화가 난 듯한 왕의 표정과 두 손을 모은 채 선처를 바라는 하만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③에스더(오른쪽)와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하만의 계책을 알아낸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Web Gallery of Art·National Gallery of Art 제공
 
현길언 작가


이방의 왕후가 된 에스더

성경 66권 가운데 한 여성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은 2권이다. 룻기와 에스더다. 룻기에서는 이방 여인이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에스더는 이방에서 피지배 민족의 한 여성이 왕후가 되어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하는 사건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이방 여러 민족과 화합함으로써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가는 사실이 드러난다.

페르시아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은 고레스 왕의 특명으로 대부분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일부는 그 나라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에스더는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다.

이후 에스더는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 민족의 생존을 위해 목숨 건 일을 벌인다. 반유대주의자의 음모로 유대 민족이 진멸될 위기에 처하자 에스더는 왕의 환심을 얻어 민족을 구한다. 이렇게 한 여성이 절대 권력자인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건 민족을 사랑하는 진정성이었다. 이는 단순한 여성의 매력을 뛰어넘는 것이다.

목숨 건 에스더의 민족 사랑

왕위에 오른 아하수에로는 각 지역 총독과 고관대작을 초청해 큰 잔치를 벌이려 했다. 그런데 와스디 왕비가 그 초대를 거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왕은 왕비를 폐하고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에스더다. 이 과정 가운데 왕궁에서 일하던 베냐민 지파의 후손 모르드개가 애를 많이 썼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였고, 에스더가 일찍 부모를 여의자 어릴 때부터 그녀를 키운 보호자였다.

왕은 친위 세력인 하만을 신뢰했다. 하만은 왕의 신임을 받자 지나치게 권력을 남용하면서 모르드개와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하만은 왕에게 유다 사람을 모두 죽이고 그 재산까지 몰수하는 법령을 내리도록 청원한다. 왕은 이를 받아들인다.

모르드개는 이 사실을 왕후 에스더에게 전하면서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부탁했다. 에스더도 마음대로 왕을 만날 수 없었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을 만나려는 건 목숨을 내건 일이다. 만약 왕이 응하지 않으면 왕후라도 사형을 당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 즈음 왕이 에스더를 찾지 않은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이런 정황에서 모르드개는 다시 에스더에게 편지를 썼다.

‘이런 때에 당신이 왕후가 되신 것은 이 민족의 위기를 건져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편지를 받아든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회신했다. ‘이 성에 있는 유다 사람들은 3일 동안 금식하십시오. 저도 내 시종들과 함께 금식하겠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왕께 나아가겠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모두 에스더를 따라 금식했다.

금식이 끝나는 날, 에스더는 예복을 입고 대궐 뜰로 나가 왕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는데, 왕이 에스더를 찾아왔다. 에스더는 왕을 위해 잔치를 마련해 초대하기로 했다. 왕은 에스더의 청대로 하만과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에스더의 용기와 지혜

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이후 궁중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문서를 읽게 됐다. 두 내시가 자기를 해하려 했는데, 모르드개가 사전에 알고 고발해 평정한 사건이 있었다. 왕은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왕은 하만을 불러 “은혜를 입은 사람을 어떻게 대접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하만은 그 대상이 자기라고 생각하고선 “임금님이 입는 옷을 입히고, 임금님이 타시는 말을 태우고 성안을 한 바퀴 돌게 하고, ‘임금님은 높이고 싶은 사람에게 이렇게 대우하신다’고 외치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모르드개에게 하만이 말한 대로 하도록 지시했다.

왕은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참여했다. 무르익은 잔치 분위기 속에서 왕은 에스더에게 무슨 청이라도 말하면 다 들어주겠노라고 말한다. 에스더는 유대 민족의 백성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처지를 전하면서 하만의 음모를 낱낱이 고발했다. 화가 난 왕은 연회장에서 왕궁 뜰로 나왔다. 그때 하만은 자신에게 내려질 왕의 처벌이 두려워 에스더에게 구명하려 왕비의 침실로 들어가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하만이 에스더를 범하려는 줄로 생각했다. 왕은 내시들에게 명해 하만을 장대에 매달아 벌을 내리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 모르드개는 페르시아 각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에게 이 사실을 기록해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은 그들이 다시 살아난 날을 기념해 ‘부림절’로 정해 지키고 있다. 이날은 유대 민족이 원수의 손에서 벗어난 해방의 날이자 슬픔이 기쁨으로, 초상날이 잔칫날로 바뀐 날이다.

유대 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에스더의 목숨을 건 노력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아무리 모르드개의 청이 절실했다 하더라도 에스더가 나서는 건 큰 모험이었다. 더구나 아무런 정치적인 세력도 없었던 유대인 신분의 여인으로선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선포할 만한 에스더의 용기와 믿음, 민족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결국 승리했다.

에스더가 성경에 기록된 특별한 이유

구국을 위한 에스더의 일념은 여성성의 또 다른 면모다. 나라를 통치하고 지키는 것은 남성의 몫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돌이켜보면 곳곳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여성의 힘이 발휘됐다.

이방 모압의 여인이었던 룻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남성과 결혼함으로써 민족 간 통합을 이뤘다. 또한 에스더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지역 상황에 적응해 살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한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구약성경 에스더에는 이방 민족 속에서 약소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는 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돼 있다. 에스더 본문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이 성경에 편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스더의 민족 사랑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시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글=현길언 작가 (계간 ‘본질과 현상’ 발행·편집인, 서울 충신교회 은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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