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사랑 없이 사랑하는 법


 
붕괴된 삼풍백화점. 한국 역사상 최악의 건축물 붕괴사고로 ‘새의 선물’이 발간된 1995년에 발생했다. 이 사건은 소설 속에서 발생한 유지공장의 화재사건을 연상시킨다. 소설에서 95년에 발생한 사건들은 69년 당시의 사건, 사고와 겹쳐져 제시된다. 작가는 “90년대지만 지금도 세상은 나의 유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필자 제공
 
마찬가지로 95년 발사된 무궁화 1호 위성은 69년 달에 처음으로 착륙한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를 연상시킨다. 필자 제공
 
69년 KAL기 납북 사건 당시 북한에 착륙했던 대한항공 여객기. 필자 제공
 
은희경


1990년대는 환멸의 시대였다. 변혁에 대한 기대와 열망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80년대를 불태웠던 혁명의 열기가 스러진 자리엔 쓰라린 환멸만이 남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차디찬 냉소가 가슴에 품었던 대의와 이상을 잠식했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1995)은 이 환멸과 냉소의 시대 분위기를 비춘 거울과 같은 소설이다. 무엇보다 차가운 환멸과 차디찬 냉소는 이 소설을 지탱하는 지배적인 정조다. 작가의 환멸과 냉소의 시선은 누구나 믿고 싶어 하는 우리시대의 신화를 겨냥한다. 그 신화란 바로 낭만적 사랑의 신화다.

낭만적 사랑? 낭만적 사랑은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생겨난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기대되는, 결혼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사랑이다. 근대 이전에 결혼은 계급을 유지하거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니 거기에 사랑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연애는 자기 영혼의 반쪽을 찾는 정신적 여정이며 결혼은 그렇게 해서 찾은 ‘특별한 사람’과의 운명이라는 의미를 얻는다.

‘날카로운 첫 키스(혹은 첫 섹스)의 추억은 운명의 지침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서사적 힘을 갖게 된다. 특히 여성에게 낭만적 사랑은 일종의 자기 발견의 서사 혹은 오디세이적 모험의 서사로 받아들여졌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그래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리고 그것은 운명이다. 낭만적 사랑은 그렇게 누구나 믿고 싶어 하는, 삶의 판타지를 지탱하는 우리 시대의 신화가 됐다.

그러나 ‘새의 선물’의 화자 ‘나’는 말한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은희경은 그렇게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부정한다. 그녀에 따르면 사랑은 하찮은 우연의 연속에 불과하며 타인과의 순수한 만남 또한 허구일 뿐이다. 사랑은 오해의 순간에 생겨났다가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믿었던 사랑은 “미혹”에 불과한 것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에 대한 환멸과 냉소야말로 은희경 소설의 인장(印章)이다. 그리고 ‘새의 선물’은 바로 그러한 은희경식 농담이 시작되는 소설이다.

‘새의 선물’은 소도시 전문대학에 자리 잡은 서른여덟 살의 강진희가 열두 살이었던 1969년을 회상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이제 막 근대화가 시작되려는 시대의 풍속을 세밀하면서도 풍부하게 재현한다. 두 채의 살림집과 한 채의 가겟집으로 이루어진 “우리집”에 세 들어 사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빚어내는 에피소드가 소설을 이끌어간다. 화자인 ‘나’(진희)는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영악하고 조숙한 아이다. ‘나’는 관찰한다. 철없고 순수한 이모, 군대를 가기 위해 서울대 법대를 휴학 중인 삼촌, 그리고 이들을 보살펴주는 실질적 가장인 할머니가 우선적인 관찰의 대상이다. 그리고 나머지 살림집과 가겟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나’는 마치 전지적 시점의 화자와 같은 권능을 과시한다. ‘나’는 이들의 모든 것을 꿰뚫고 관찰하면서 이들이 빚어내는 소소한 일상 속의 비밀과 거짓말을 염탐하고 간파하고 분석한다. 이를 통해 ‘나’가 확인하는 것은, 짐작과는 다른 비루한 생의 이면이다.

이때 ‘나’의 바라보는 행위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을 확보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월한 구경꾼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외면하고 싶은 끔찍하고 추악한 현실을 오히려 거꾸로 뚫어지게 바라봄으로써 면역력을 길러 그 현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나’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이런 방식을 통해 조정되고 통제된다. ‘나’ 자신 또한 거기서 예외는 아니다. 이를 위해 ‘나’는 의식의 조작을 통해 자신을 두 개의 ‘나’로 분열시킨다.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그것이다.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다. 슬픔을 느끼자,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나’의 어머니는 대인기피와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를 하다가 끝내 요양원에 갇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내팽개치고 재혼해버렸다. 그로 인해 ‘나’는 상처받지만 결코 슬픔과 고통에 빠지진 않는다. 어떻게? ‘극기훈련’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나’의 극기훈련이란 바로 자아를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한 뒤, 슬픔을 느끼려는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가 “뚫어져라 오랫동안”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演技)로서의 삶이다. 이를 통해 ‘나’는 슬픔의 감정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진정성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극복의 대상은 슬픔뿐만이 아니다. 쥐나 벌레에 대한 혐오감에서부터 타인에 대한 증오와 사랑, 심지어 진정성에 이르기까지,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을 응시함으로써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는 자기방어적 태도다. 즉 그것은 대상과의 무심한 거리를 확보하고 세계를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이다.

그런 자기방어적 태도의 극명한 표현이 바로 성장의 거부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서른여덟 살인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회고하는 형식을 취한다. 거기서 우리는 이 소설이 무지에서 앎으로, 미숙함에서 성숙함으로,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변화하는 성장의 과정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기대를 배반한다. 처음부터 프롤로그의 소제목은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달려 있다. ‘나’의 성장은 열두 살에 완료된다. 그것은 ‘나’가 이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을 삭제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

‘나’는 말한다. “그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그 목록을 다 지워버렸을 때, ‘나’의 성장은 완료된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나’의 성장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세상이 좋게 변하리라는 기대마저 포기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장이라기보다 ‘정체’ 혹은 ‘지체’에 가깝다. ‘새의 선물’을 “성장 없는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환멸과 냉소는 바로 그 순간 피어오른다. 그것은 더 이상 삶에 대한, 타인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을 때 갖게 되는 정서 상태다. 특히 ‘나’는 주변 여성들이 겪는 사랑의 흥망성쇠를 냉정하게 관찰하며 냉소를 실천한다. 그것은 사랑에 덧씌워진 판타지를 벗겨내고 사랑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폭로하는 일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다. 강제로 “욕을 당해” 결혼한 뒤 외도와 구타를 일삼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이를 “팔자”로 받아들이는 광진테라 아줌마, 망한 집안의 생계를 위해 식모로 일하던 병원의 원장에게 겁탈당해 쫓겨난 뒤 서울에서 양공주가 된 방앗간집 맏딸 영숙 이모, 신분상승을 위해 뭇남성에게 교태를 부리다가 끝내는 “가장 처지는 남자”와 함께 돈을 훔쳐 야반도주한 미스리, 유부남과의 사랑으로 많은 것을 잃은 혜자 이모, 첫사랑에게 배신당하고 혼전임신으로 중절수술을 하게 된 ‘나’의 이모.

‘나’ 또한 자신이 사랑했던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이 첫사랑이었던 허석의 것이 아닌, “더러운 낯빛의 구부정한 아저씨”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논리는 언제나 대상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이렇듯 ‘나’는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상투적인 낭만적 사랑의 신화에 빠져 공전하는 여성들의 삶을 지켜보며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나’는 말한다.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나’는 지치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 없이 사랑하는 법이다. 사랑의 고통을 벗어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사랑에 무심해지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진정한 환멸과 냉소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무가치한 것으로, ‘나’와는 무관한 ‘나’ 바깥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새의 선물’이 주장하는 사랑의 전략이다.

‘새의 선물’의 작가는 말한다. 사랑은 우연적 사건에 불과하며 단편적 이미지에 일시적으로 매혹된 것에 불과하다. 세상의 모든 가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나’는 말한다. “나는 인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환멸과 냉소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새의 선물’은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가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되어간 90년대 문학의 운명을 보여주는 매혹적인 징후다.

■ 은희경은
특유의 냉소·농담으로 생의 비애를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으로 다뤄


은희경(58·사진)은 1995년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이중주’라는 소설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부문에 당선됐다. 같은 해 첫 장편소설인 ‘새의 선물’로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새의 선물’은 비평가는 물론 대중독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게 됐다. 97년에는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동서문학상을 받았다. 이 소설집 또한 독서계와 출판계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98년에는 ‘새의 선물’의 주인공 강진희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장편소설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를 출판했으며, 단편소설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은희경은 한국의 대표 작가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는다. 은희경 소설은 작가 특유의 냉소와 농담의 방법론으로 생의 비애를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으로,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다룬다. ‘새의 선물’에서부터 은희경 소설의 특징이 된 연애소설 아닌 연애소설은 상투적 인간관계를 비틀고 뒤집어서 새로운 방식의 관계맺기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소설작법을 실험하면서 한국문학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고 있다.

소설집에는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중국식 룰렛’이 있고, 장편소설은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이 있다.

<김영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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