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미성년의 인공낙원


 
미국의 대표적인 팝아트 미술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인 ‘Oh, Jeff, I Love You, Too... But...’. 소설 속 아담이 만난 여성화가의 그림 속 말풍선을 연상시킨다. 필자 제공
 
위 사진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 소녀는 언뜻 자유분방해보이지만 “청순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불안”으로 떠는 소설 속 미성년들의 자화상이다. 아래 사진은 아담의 롤 모델인 지미 헨드릭스. 필자 제공
 
‘88 서울올림픽’ 장면. 서울올림픽은 ‘아담이 눈뜰 때’의 시간적 배경이다. 필자 제공
 
장정일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는 ‘1990년대 문학’의 시작을 알린 소설이다. 90년대는 이전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큰 폭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90년 독일이 통일된 후 세계는 빠르게 냉전 종식이 이루어졌으며 한국에서도 문민정부가 수립됐다. 90년대는 경제적으로 80년대 말의 ‘삼저’(저유가·저달러·저금리)에 힘입은 경제 활성화의 과실이 본격적으로 만개하면서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시기이기도 하다. 소비주의의 확산과 정보혁명으로 인한 통신기기의 발달로 라이프스타일이 획기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90년대였다.

‘아담이 눈뜰 때’는 ‘88 서울올림픽’이 벌어지는 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90년대에 전개될 한국사회 전반의 변화를 앞질러 보여준다. 그 변화의 표지는 대략 ‘개인주의’ ‘자유주의’ ‘대중문화’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팽창하던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90년대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80년대적인 무거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90년대 초에 크게 유행한 ‘천만 번을 변해도 나는 나’라는 광고 카피는 개성을 중시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당시 문화 전반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90년대 문학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 신세대 문학은 모든 딱딱하고 권위적인 것들을 공격하고 기존의 문학 관습과 문법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감수성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히 거기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구호도 뒤따랐다.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는 바로 그런 신세대문학의 선두에 있는 작품이다.

‘아담이 눈뜰 때’는 열아홉 살 재수생인 아담이 성적 일탈과 문화적 방랑을 겪다가 결국 글쓰기에서 진짜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성장소설이다. 오정희나 김원일 등의 소설이 그런 것처럼 대개 한국 성장소설은 가난과 결핍감, 소외감을 겪던 어린 소녀 혹은 소년이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세상의 논리를 부분적으로나마 내면화하면서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각성에 도달하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때 각성이란 세계의 부조리함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정신의 성숙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눈뜰 때’에서 ‘나’는 끝까지 이 세계로의 편입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 미성년(未成年)으로 남기로 결심한다.

소설에서 ‘나’와 은선, 현재처럼 아직 성년에 도달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 미성년의 불안과 고독, 우울을 상징하는 대상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사춘기’다. 뭉크의 ‘사춘기’는 타락한 세계에서 “청순한 세계”를 동경하는 미성년의 이미지를 압축한다. 아담은 그렇게 성숙과 교양이라는 안정적 가치를 거부하는 반(反)성장소설의 주인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격렬한 반성장의 제스처가 현대예술에 대한 지적 탐구를 통해 지탱된다는 점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해서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 구절은 아담의 성장 이야기가 타자기, 뭉크화집, 턴테이블로 상징되는 ‘예술적인 것’에 대한 경도(傾倒)로 이루어질 것임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이 소설은 ‘나’가 이 세 물건을 손에 넣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자기의 정체성이 타자기, 화집, 턴테이블과 같은 고급한 취향의 문화자본의 획득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취향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은 사회계급을 규정하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취향을 통해 ‘나’는 다른 계급, 출신, 학력을 가진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 짓는다. ‘나’는 비록 화집을 얻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미지와 사춘기를, 턴테이블을 얻는 과정에서 영혼의 순결을 도둑맞지만, 화집과 턴테이블이야말로 자신을 남들과는 다른 지적이고 예술적인 존재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런 구별 짓기는 소설에서 언급되는 많은 음악들, 특히 60년대 록음악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나’와 현재는 또래들이 듣는 팝음악을 타락한 “구역질나는 음악”으로 치부한다. 그 대신 그들은 “‘록 스피릿’이라고 불리던 저항과 인간애가” 가득한, 보수적인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신세대적 광기와 열정, 허무와 퇴폐가 뒤섞인 혼돈의 음악인 60년대 록음악만을 듣는다. 특히 만 27세에 모두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성스러운 3J’, 즉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핸드릭스는 그들에겐 타락한 정치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냉소를 보내고 기성세대를 조롱하면서 자기들만의 이상적인 낙원을 꿈꿨던 운동가들이다.

그러나 소설 속 ‘나’와 현재에게 음악은 실은 저항운동이라기보다 외려 자기만족적인 공간에 자기를 가둠으로써 자기 바깥의 존재를 배제하는 구별 짓기에 불과하다. 60년대 록음악을 비롯한 수많은 음악들(‘올디스 벗 구디스’ ‘스탠다드’ 등과 같은 “진짜 음악”)도 단순히 소설 속 장면들(특히 섹스 장면들)에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일종의 효과음(BGM)의 역할에 그친다.

‘나’ 또한 자기의 예술적 취향이 거칠고 두서가 없으며 약간의 ‘허영’이 가미되었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반짝이는 문화상품들은 여전히 ‘나’를,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매혹한다. 혁명 저항 진정성 사랑 등과 같은 전시대의 가치들조차 이제는 대중문화를 통해서만 향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90년대적인 것’은 그렇게 시작된다.

소설에서 성장의 또 다른 계기는 ‘나’가 성(性)을 통해 이 세계와 접촉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아담이 눈뜰 때’에서 그려지는 십대들의 성적 일탈은 서사 전체를 압도하면서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나’에게 성관계는 “오줌을 누듯이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유희적 행위에 불과하다. ‘나’는 성관계를 대가로 내가 원하는 뭉크 화집과 턴테이블을 얻기도 한다. 심지어 여고생인 현재는 디스코텍에서 만난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대가로 돈을 받아 그 돈으로 ‘나’와 부산에 놀러가기도 한다. 그럴 때 성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의 성격을 띠게 된다. ‘나’의 그런 성적 경험이 특별한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맺기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나’ 또한 그 점을 잘 안다. 중년의 여성화가에게서 받은 뭉크 화집에는 ‘나’가 그렇게도 원하던 그림 ‘사춘기’가 찢겨져 있었으며, 남색가인 오디오점 주인과의 항문성교 후에 ‘나’는 화장실 변기에서 역류한 오물이 자신을 더럽히는 꿈을 꾼다.

그렇게 ‘나’는 타락한다.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나’는 오디오점 주인에게 받은 모욕을 그대로 현재에게 돌려줌으로써 현재와의 진정한 소통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그 대신 ‘나’는 현재와 항문섹스 후에 스스로를 ‘똥’과 ‘개’로 비하하고 조롱한다.(“나는 개다. 똥을 주워 먹는다. 나는 개다. 똥을 주워 먹는다. 나는 개다. 똥을 주워 먹는다….”) 타락한 세계에 저항하기 위해 ‘나’와 현재가 선택한 타락이라는 동종요법은 그들을 진짜로 타락시킨다. 디스코클럽의 10층 유리창을 깨고 추락한 현재의 자살이야말로 ‘타락’ 그 자체를 이미지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나’는 어떤가?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짜 낙원에서 잘못 눈을 뜬 아담처럼. 내 이브는 창녀였으며, 내 방은 항상 어둡고 습기가 차 있다. 어쩌다 책이 썩는 냄새를 없애려고 창문을 열면, 네온의 십자가 아래서 세상은 내 방보다 더 큰 어둠과 부패로 썩어지고 있다. 나는 내가 눈 뜬 가짜 낙원이 너무 무서워서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비로소 록음악과 섹스로 이루어진 자기만의 세계가 가짜라는 진실을 깨닫는다. 비루하고 억압적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여기가 아닌 저기” 혹은 “아무와도 공유하지 않는 내면의 방”은 그저 이 세계의 반짝이는 상품들이 반사되고 무한 복제된 인공낙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타락한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대 입학이라는 안정된 길을 포기하고 등록금의 일부를 헐어 타자기를 산다.

타자기는 ‘나’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팔지 않고 직접 구매한 유일한 물건이다. 그리고 ‘나’는 “문장을 쓴다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통해 ‘진짜’ 낙원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진짜’ 낙원을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한 90년대의 세계에서 진짜 ‘진짜’는 오직 순수한 거짓말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눈뜰 때’는 어떤 측면에서 자기애적 포즈와 치기로 가득찬 미성숙한 소설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 이 소설은 ‘90년대적인 것’의 뜨거운 징후가 될 수 있었다.

■ 장정일은
위반과 전복의 작가… 性的 금기 다뤄 ‘유죄판결’


장정일(55·사진)은 위반과 전복의 작가다. 그는 한국문단에서 흔치 않는 중졸자다. 1994년부터 시작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대학에 가지 않고 독학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10대 시절에는 폭력 사건에 연루되면서 소년원에서 복역하기도 하는 등 오랫동안 정신적 방황을 하지만 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스물네 살이었던 86년에는 ‘햄버거’와 ‘티브이’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적 일상을 파격적인 형식실험을 통해 다뤘던 두 권의 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과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발간한다. ‘햄버거에 관한 명상’으로 제7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다.

87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실내극’이라는 제목의 희곡이 당선되어 극작가로도 활동한다. 그러다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시가 직업이 되지 않”아 시를 버리고 소설의 세계로 들어선다. 88년 세계의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펠리컨’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89년 첫 장편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를 시작으로 ‘아담이 눈뜰 때’(90) ‘너에게 나를 보낸다’(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94) ‘내게 거짓말을 해봐’(96) 등을 연속적으로 출간하면서 신세대 작가로 비평가와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다. 이때 출간된 그의 장편소설은 모두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국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온갖 성적 금기, 예컨대 동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등을 다룬 ‘내게 거짓말을 해봐’ 때문에 그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의해 ‘음란문서 제작 및 배포혐의’로 기소된다. 96년 말에 기소된 작가는 2000년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유죄판결(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받는다. 이 필화사건 이후에 작가는 장편소설 ‘보트하우스’(99) ‘중국에서 온 편지’(99) ‘구월의 이틀’(2009)을 발간했다.

<심진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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