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문학의 언어로 쓴 전쟁자본론


 
월남 파병 환송식. 당시 월남 파병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선전됐다. 필자 제공
 
베트남 민족해방투쟁을 이끈 지도자 호찌민. 그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사망했다. 필자 제공
 
전 세계 미군 PX가 암시장과 연결돼 있다고 폭로한 66년 1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군 PX에 의해 형성된 다낭의 암시장을 무대로 전개된다. 필자 제공
 
황석영


1964년 미군의 폭격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냉전기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지배 전략이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형태로 드러난 침략전쟁이다. 반면 베트남 민중의 입장에서 이 전쟁은 외세의 침탈에 맞선 오랜 민족해방투쟁의 연장이었다. 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전쟁은 결국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박정희 정권은 당시 자유진영의 수호와 경제 원조라는 이념적 경제적 명분을 내세워 베트남에 30만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병사들의 참전으로 벌어들인 '블러드 머니(blood money)'는 이후 한국이 경제 특수를 누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야만적인 탐욕과 살육으로 얼룩진 '더러운' 전쟁이었다. '외화벌이'를 대가로 미국의 야만에 힘을 보탠 우리 역시 그 탐욕과 살육의 당사자였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66년부터 실제 파병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작가 황석영은 그에 대해 최근 출간된 자전 '수인'(문학동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도 자유롭게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의 미군 측 보도자료에 나온 것만으로도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 분명해진다."

황석영은 ‘수인’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말한다. 민간인의 귀를 자른 뒤 말려 끈에 꿰어 수집했고 잘린 머리를 들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으며 여성의 그곳에 뱀을 집어넣거나 수류탄을 넣어 터뜨렸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일까? 황석영은 미국군에 의해 행해진 밀라이 학살 사건조차도 베트남전쟁에서 행해진 가혹 행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적는다.

밀라이 학살 사건은 68년 26명의 미국 군인들이 대부분 여성과 아이였던 504명의 민간인을 한날한시에 대량 살육한 사건이다. 그는 이어 말한다. “이는 그대로 한국군에도 해당이 되는 얘기였다. …나는 한국전쟁 이래로 이러한 폭력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었고 베트남전쟁으로 심화되면서 몇 년 뒤에 광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백주의 살육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 황석영에게 베트남전쟁은 이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오래 전 그가 88년 출간된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에서 말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무기의 그늘’은 75년 ‘난장(亂場)’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 후 중단을 거듭하다 88년에야 비로소 완성돼 두 권으로 묶여 나왔다. 베트남전쟁이 시작된 후 전쟁의 실체적 진실은 오랫동안 냉전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의해 은폐되거나 호도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환과 토론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72년부터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이어 실린 리영희의 글 ‘베트남전쟁’이었다. 그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은 부도덕한 제국주의와 반민중적 권력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해방투쟁이었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또한 그런 시각을 공유한다. 작가는 자신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그런 시각을 더욱 풍부한 문학적 언어로 구체화한다.

황석영에 따르면 ‘무기의 그늘’은 “고통당한 아시아 민중의 보편적 삶과 투쟁의 정당성”(92년 개정판 작가의 말)에 대한 연대의식 속에서 씌어졌다. ‘무기의 그늘’에서 미국의 전쟁물자와 자본에 의해 유린되는 베트남은 우리의 거울상이다. 작가에게 베트남은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분단과 외세의 지배 아래 고통 받는 한국적 상황의 거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기의 그늘’이 그려놓은 베트남전쟁이란 무엇인가? ‘난장’이라는 원제가 그 전쟁의 본질을 압축한다. 그것은 미국이 풀어놓은 PX(post exchange·군부대 내 매점) 물자들의 소비와 유통과 교환을 두고 펼쳐지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지옥도(地獄圖)다.

‘무기의 그늘’의 이야기는 전장의 전투요원으로 있다가 합동수사대 한국군 파견대의 시장조사원으로 차출된 안영규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소설의 또 다른 한 축은 미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아 부를 불려나가는 남베트남 장교 팜 꾸엔, 그리고 반대로 미국과 싸우는 해방전선에 가담하는 그의 동생 팜 민의 이야기다. 작가는 그렇게 더러운 전쟁의 수렁에 빠져든 미군과 한국인, 남베트남 군인 관료와 해방전선 전사 등의 사연을 한데 엮고 교차시키면서 베트남전쟁의 총체적인 진실에 접근해간다.

주인공인 시장조사원 안영규의 임무는 미군과 협력해 다낭의 블랙마켓(black market·암시장)에서 유통되는 미국 군수물자의 유출 경로와 거래선의 실체를 조사하는 것이다. 그는 블랙마켓에서 거래되는 무기와 상품의 유통 경로를 추적하고 탐문하면서 진실에 다가간다. 암행과 추격전, 총격전도 뒤따른다. 그런 점에서 그의 면모는 마치 미국 느와르 영화의 탐정을 닮아 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회의와 동요, 방관적 태도와 나른한 허무까지도 그에 맞춤하다. 그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사지가 찢기고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가 아니라 오히려 후방에 있다. 다낭의 시장은 피비린 “죽음의 냄새”가 “상품의 잡동사니와 사람들의 서로 떠드는 소리”에 묻혀버리는 곳이다. 바로 그 시장이야말로 전쟁의 진짜 맨얼굴이 드러나는 장소다. 미국이 블랙마켓에 의도적으로 풀어놓아 넘쳐나는 PX의 물자들은 베트남의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미국 상품에 대한 욕망을 부풀리며 그럼으로써 베트남의 시장경제를 완전히 장악한다. 미군 사령부에 의해 시장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US달러 군표는 베트남의 시장을 통제한다. 블랙마켓을 조사해온 안영규의 결론은 이렇다. PX야말로 미국의 가장 강력한 전쟁 무기다.

그리고 PX는 바나나와 한 줌의 쌀만 있으면 오순도순 살아가는 아시아의 더러운 슬로프헤드들에게 문명을 가르친다.… 한 번이라도 그 맛과 냄새와 감촉에 도취된 자는 결코 죽어서라도 잊을 수가 없다. 상품은 곧바로 생산자의 충복을 재생산해낸다. 아메리카의 재화에 손댄 자는 유에스 밀리터리의 낙인을 뇌리에 찍는다. 캔디와 초콜릿을 주워먹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저들의 온정과 낙천주의를 신뢰한다. 시장의 왕성한 구매력과 흥청거리는 도시 경기와 골목에서의 열광과 도취는 전쟁의 열도에 비례한다. PX는 나무로 만든 말(馬)이다. 또한 아메리카의 가장 강력한 신형무기이다.

작가는 주인공 안영규를 그렇게 후방의 시장에 옮겨놓음으로써 전쟁의 총체적인 본질을 조망하게 만든다. 다낭의 블랙마켓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상연되는 극장이다. 다시 말해 PX에서 흘러나온 미국의 상품과 US달러 군표가 유통되고 교환되는 시장이야말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다. 소설에 따르면 달러는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 곰팡이꽃”이다. 전쟁이란 결국 달러의 지배력을 확장해나가는 “가장 냉혹한 형태의 장사”이며 그럼으로써 식민지 경영을 가장 효율적으로 뒷받침하는 수단일 뿐이다. 작가는 다낭의 블랙마켓을 중심으로 암거래를 통해 증식되고 교환되고 유통되는 US달러의 운동을 치밀하게 따라간다. 그것은 비유컨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묘사한 전지전능한 화폐의 운동과 그에 종속되는 인간의 운명을 베트남의 시장을 배경으로 다시 쓰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조금 과장해 말하면) ‘무기의 그늘’은 문학의 언어로 쓴 ‘전쟁자본론’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떠받치는 자기 안의 역설과 모순에 의해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전쟁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미군의 이윤을 보장해주고 미국의 시장지배를 유지시킨 블랙마켓에서 거래된 무기는 부패한 남베트남의 군인과 관리의 손을 거쳐 상당 부분 해방전선측으로 흘러들어갔다. 그것이 결국 미국을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황석영이 ‘무기의 그늘’에서 무기 암거래의 실상에 대한 묘사를 통해 암시하는 것은 바로 US달러를 통한 미국의 시장지배가 이르게 된 바로 그런 역설적인 파국의 운명이다.

그리고 파국은 시종 떠나버리면 그만인 방관자로 행세했던 안영규에게도 찾아온다. 그를 보조했던 베트남인 토이가 해방전선 전사에게 살해되자 그는 비참하게 죽은 토이와 용병으로 끌려온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복수의 광기에 사로잡혀 팜 민을 사살한다. 그런 안영규의 모습에 작가는 베트남전쟁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한국인의 자의식을 겹쳐놓는다. 이 과정에서 그가 떠안게 되는 피해의식과 죄의식의 모순된 감정에 대한 성찰은 아쉽게도 더 이상 진전되진 않는다. 그 대신 소설에서 강조되는 것은 제국에 의해 유린당한 베트남의 운명이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내가 베트남인”이라는 연대의식이다.

내가 여덟 살 때에 전쟁이 터졌다. 아니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에 식민지로부터 풀려났지. 내 부모 세대들은 다른 강국을 위하여 식민지의 용병으로 아시아와 태평양의 도처에서 지금처럼 죽어갔다. 너희들은 그때부터 왔다. 너희 정부는 우리의 국토를 반으로 갈라서 점령했다. …나는 오히려 내가 베트남인과 같다고 말해 버린다. 우리가 겪은 이러한 삶의 조건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아시아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이 당해온 조건이다. 백인들은 사냥감을 다투는 짐승들처럼 여러 대륙에서 피묻은 발톱과 이빨로 서로를 물어뜯었다.

이런 인식이 소설 전체에 걸쳐 충분한 형상화로 녹아들어 있지 않음을 독자들은 아쉬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황석영이라면, 다낭 블랙마켓의 더러운 진실이 이미 그 자체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 황석영은
베트남전 참전했던 한국 대표작가


황석영(74·사진)은 1962년 사상계에 단편소설 '입석부근'이 당선되고 이어 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탑'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그 사이에 작가는 숭실대학교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했고 66년 대학에서 제적된 뒤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청룡부대 제2진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그후 분단시대 한국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긴 '객지'(1971) '한씨연대기'(1972) '삼포가는 길'(1973) 등의 문제작을 연이어 발표했다. 74년 7월부터 한국일보에 대하소설 '장길산' 연재를 시작해 84년 전 10권으로 출간했다. 89년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방북해 방북 기간 동안 김일성과 만난 이후 귀국하지 못한 채 유럽을 떠돌다가 독일예술원 초청작가로서 91년 11월까지 독일의 베를린에 체류했다.

이 시기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연재하기도 했다. 93년 4월에 귀국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98년 3월에 특별 사면되면서 창작활동을 재개한다. 80년대 이후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 운동가의 사랑과 운명을 다룬 '오래된 정원'(2000), 남북분단의 비극에 대한 해원의 열망을 담은 '손님'(2001)을 비롯해서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의 장편을 쉬지 않고 쓰면서 한국의 대표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해왔다.

올해는 자신이 공동저자로 참여한 5·18민주화운동의 증언 기록물 '시대를 넘어 역사의 어둠을 넘어'의 증보판을 냈고, 현대사의 굴곡을 그대로 겪은 작가의 지난 삶을 기록한 자전 '수인'을 펴내면서 열정적으로 활동 중이다.

<김영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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