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사랑이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요 덮어주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끼었을 것 같은 금반지가 영원한 약속을 상징하는 듯하다. 박계주의 소설 '순애보'는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을 주제로 쓰여졌다.
 
서울 성북구 돈암감리교회 전경.
 
서울 성북구 미아리고개가 시작되는 지점에 돈암감리교회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박계주와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했던 돈암감리교회가 나온다.
 
영락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걸어 나오는 젊은 시절의 박계주. 대산문화재단 제공
 
소설이 연재됐던 매일신보와 '순애보' 표지.


"문선 오빠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왼팔은 명희 언니가 끼고 북한산 약수터에 있는 벽하정 정자까지 가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옵니다.… 지난주일 밤 예배에 특별 찬송이 있었는데 그것은 명희 언니의 피아노 반주에 문선 오빠의 독창이었습니다. 온 교인은 이 젊은 눈 먼 예술가의 노래를 열광적으로 찬탄했습니다.… 명희 언니는 문선 오빠의 손이요 발입니다. 날이 갈수록 변할 줄 모르는 그들의 사랑, 신성한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새삼 음미케 됩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과 희생, 인내와 헌신을 담은 박계주(1913∼1966)의 장편 소설 '순애보(殉愛譜)'의 마지막 부분이다.

순애보는 1938년 매일신보 소설 공모전의 당선작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선정 이유를 “일찍이 조선의 신문지상에 이같이 높고 깨끗한 사랑에 순절하는 청춘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실려 본 일이 없는 특별한 작품으로 인생으로서 가져야 할 높은 철학과 순결한 도덕을 갖춘 작품”이라고 밝혔다.

순애보는 1939년 1월부터 6개월 동안 매일신보에 연재됐고 같은 해 10월,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발간 보름 만에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였고 해방 전까지 10만부가 팔렸다. 해방 후에도 꾸준히 발행됐으며 두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

박계주의 작품세계는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순애보의 세계와 일치한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용서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순결하고 희생적인 남녀의 사랑을 극적으로 잘 그려냈다. 춘원 이광수는 순애보 서문에 이렇게 평했다. “사랑은 주는 것이요.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한량없이 주어 마침내 목숨까지 주어버리는 것이 사랑이다. 크리스천인 작가는 그리스도의 ‘주라’ 하신 사랑 원리의 신봉자다. 그가 소설 순애보를 쓴 것은 자기가 체득한 이 정신을 인류 동포에게 들려주자는 것이다. 인류 동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정신을 나누게 하자는 것이다.”

이 소설이 안고 있는 정신은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이다. 주인공 문선이 도둑질한 제자를 대신해 매를 맞거나, 병든 자식과 아내 때문에 죄를 지은 살인범 대신 죄를 뒤집어쓰거나,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장애가 짐이 될까 떠나는 등으로 참사랑의 가치와 실천을 보여줬다. 또 순교자적 사랑의 삶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작중 인물의 삶을 통해 증거했다.

어린 시절 소꿉동무였던 최문선과 윤명희가 20여년 만에 재회 후 서로 순결한 애정에 이끌린다. 한편 인순은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문선을 열정적으로 따랐다. 간청에 못 이겨 인순의 집에 갔을 때 괴한이 문선의 눈을 멀게 하고 인순을 죽여, 문선에게 치정살인의 누명을 씌웠다. 그러나 사형선고를 받은 문선 앞에 범인이 나타나 자백하고 마침내 범인의 자수로 풀려나온 문선은 명희의 행복을 빌면서 함흥의 시골 마을로 떠났다. 명희가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명희가 문선 앞에 나타난다. 결혼 후 명희는 문선에게 헌신하고, 문선은 ‘순애보’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한다. 소설 순애보의 줄거리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기였다. 중일전쟁을 지나 일본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앞둔 전시체제였다. 낭만적 감정이 허용될 여지가 있었을까. 독자들은 왜 그토록 열광했을까. 그것은 ‘순애보’에는 식민지의 고단한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따뜻함과 평온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헌신과 용서에서 비롯된 감정이었으며, 박계주가 지향한 기독교적 사랑의 세계이기도 했다. 작가가 의도한 지순한 사랑의 욕구가 독자층의 갈망에 부합했다.

‘순애보’와 ‘장군의 아들’

영화 ‘장군의 아들 2’에 ‘순애보’와 저자 박계주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대의 주먹 김두한이 격투 중에 부상당해 입원한 병실에서 ‘순애보’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후일담이 더 흥미롭다.

대산문화 2013년 10월호에 작가의 차남 박훈(69)씨는 ‘나의 아버지 박계주’란 수필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박계주와 김두한은 어느 날 모 술집에서 같은 시간대에 머물게 된다. 전말이야 어떻든 김두한이 손님에게 행패를 부린다. 이를 본 박계주가 싸움을 말리는 게 아니라 생면부지의 그에게 일갈한다. ‘네 아버님이 어떤 분이셨는데 자넨 지금 후레자식 같은 행패를 일삼고 있느냐.’ 일장 훈시 끝에 김두한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한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북간도 용정의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독립투사들과 교류가 있었고, 교육자로서 김좌진 장군과의 만남은 특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6·25전쟁 후 영락교회에 다니다 이후엔 아내와 함께 돈암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다. 작가와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했던 서울 성북구 돈암감리교회를 최근 찾았다. 현재 철학관이 늘어서 있는 미아리고개가 시작되는 지점에 교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숲이 우거진 미아리고개 위는 까마득하게 바라보일 정도로 높았을 것이란 상상을 하며 골목을 걸어 교회에 도착했다. 마당엔 어린이집 어린이들이 한낮의 태양을 피해 그늘에서 놀고 있었다.

작가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현재 차남과 막내아들만 생존해 있다. 박훈씨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간 아버지를 간병하시던 어머니마저 지병을 얻어 3개월 후 돌아가셨다”며 “말년에 입원과 치료의 반복으로 가족들은 정릉 집을 팔고 미아리고개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막내아들 박일(61)씨는 “어린시절 소설가와 시인들이 북한산 등산을 하고 집에 자주 놀러왔던 기억이 난다”며 “정릉과 미아리 옛집엔 주택과 아파트들이 들어서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계주는 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단편 ‘적빈’으로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1933년 평양의 예수교회 중앙선도원 기관지 ‘예수’ 편집책임자로 일하면서 기독교에 관한 30여편의 글을 발표했다. 1936년 경성으로 갔으며 이듬해 전영택 목사가 주재하던 월간 ‘새사람’의 동인 겸 편집장이 됐다. 1939년 2월 전영택 목사의 주례로 호수돈여고와 경성의대 출신의 김응신과 결혼했다.

신문 연재 소설 ‘여수’ 필화 사건

박계주는 평생 신문 연재소설에 주력했으나 남녀의 애정문제만 다룬 통속작가가 아니라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진보적인 역사관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 그의 소설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을 제재로 했다. 1860년대 기독교 박해사건을 다룬 ‘구원의 정화’, 6·25전쟁 전후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그린 ‘별아 내 가슴에’, 일제하 항일독립투쟁을 형상화한 ‘대지의 성좌’, 자유당의 몰락을 예견한 ‘장미와 태양’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소설은 50여편에 달하고 시, 수필,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인생의 고비가 찾아왔다. 박계주는 독재와 부패를 고발하려고 1962년 동아일보에 장편 ‘여수’를 집필했으나 필화 사건을 겪었다. 자유당 독재를 비판한 소설을 써 반정부 작가로 알려진 작중 인물 이춘우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오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받았던들 오년 뒤엔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되었을 것”이라며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김구의 태도를 비판한 내용 때문에 곧바로 연재가 중단됐다. 이후 어느 곳에서도 그의 글을 실으려 하지 않았다. 고난은 시련을 동반했다. 작가는 63년 5월 21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을 얻어 고생하다 66년 4월 7일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파주군 아동면 검산리 감리교 묘지에 안장됐다.

소설가 박계주는 현대인들에게 잊혀지고 있지만 그가 구가한 정신은 영원할 수 있다. 누명을 쓴 문선을 향해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하는 명희의 말을 통해 ‘순애보적 사랑’이 바로 이용도 목사의 ‘사랑의 신비주의’란 생각을 했다. “사랑이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요. 덮어주는 것이요. 그리함으로써 본래의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은 사랑은 주는 것이요.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에는 나를 제공하고 희생만이 있을 것입니다.”(‘순애보’ 중에서)

■ [박계주처럼 생각하기]
"고난과 사랑이 잠든 영성을 깨운다 "


박계주는 '화수분'의 작가 전영택과 함께 감리교 이용도(1901∼1933)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순애보의 문학적 의미도 이 목사의 '사랑의 신비주의'를 형상화해 사랑의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랑의 신비주의'는 십자가를 진 예수의 고난을 체휼해 예수와 일체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운동. 작가는 그 예수의 사랑만이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작가는 참된 사랑은 남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라 여겼다. 소설 '순애보'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역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며, 이 사랑이 검은 죄를 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 명희의 아버지 윤 목사의 입을 통해 사랑은 한없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누구든지 사랑을 주지 않고 남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할 때 그 사람은 가장 불행한 것이다.…사람은 누구에게나 가지려는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또 받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한 것이며, 불만하다는 것은 곧 거기에 평화와 기쁨과 자유가 없다는 증좌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주려는 참된 사랑을 소유하는 때에 비로소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순애보' 중에서)

두 눈을 잃고 살인자의 누명까지 쓰게 된 문선은 살인범 치한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되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했을 뿐 아니라 원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또 작가는 문선이 묵묵히 자기를 죽이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세심하게 그렸다. "나(自我)라는 것이 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남을 이용하고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어떻게 하여서든지 내 배만을 불리고 쾌락만을 취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나를 광고하고 선전하고 높이기에 급급한 '나'를 문선이는 가장 무서운 자기의 적임을 깨닫고 이 무서운 적과 싸워서 이기기를 힘썼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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