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세상 소풍왔다 떠난 자리, 행복을 남기다

천상병 시인 부부가 함께 출석했던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연동교회 예배당의 빈자리.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왔다가 하늘로 돌아간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안면도 천상병 고택 전경(위), 고택의 열려진 방문 밖으로 송림과 바다가 보인다.
 
천상병 시인 부부가 함께 다녔던 서울 연동교회와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서 시작되는 천상병 산길, 1985년 문을 연 인사동 귀천 카페(위쪽부터).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인생의 고단함과 죽음의 쓸쓸함마저 초월하고 이 땅에서의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노라 노래한 천상병(1930∼1993) 시인의 대표 시 ‘귀천’의 전문이다. 1970년 6월 발표한 작품으로 부제는 주일(主日)이다. 시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천 시인이 평소 막걸리를 좋아하고 평범하지 않은 행동으로 교회와 거리를 뒀을 것 같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불행 따윈 두렵지 않다고 여겼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더구나 /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행복’ 중에서)

시인과 연동교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왔다가 하늘로 돌아간 천 시인은 1981년부터 아내와 함께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연동교회 3층 예배당 맨 앞줄에 앉아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시인은 예배를 보는 동안에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또 기도할 때는 자주 “하나님 용서해주이소 용서하이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인은 예배가 끝나면 얼른 1층으로 내려가 당시 담임목사인 김형태 목사와 인사를 나눴다.

시인은 원래 가톨릭 신자였다. 기독교방송에서 김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아 연동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처음 교회에 간 날, 천 시인은 김 목사에게 “목사님, 저는 가톨릭입니다.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설교가 좋아서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81년 2월 ‘현대문학’에 발표한 ‘연동교회’라는 시에 이런 그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은/ 명동 천주성당에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엿한 천주교 신도인데도/ 81년부터는/ 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 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으로/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서/ 그동안 두 번 설교를 하셔서/ 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 교회당 구조도 아주 교회당답고/ 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 아내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 그동안 가톨릭에 구애되어 나 혼자/ 명동 천주성당에 나갔으나/ 그런데 81년부터는 다릅니다/ 한 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 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 물론 개종은 않고 말입니다/ 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

시인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지난 18일 오전 연동교회를 찾았다. 주일예배를 드린 후 1층 성전 앞에서 만난 이성희 담임목사는 “제가 연동교회에 부임했을 땐 천 시인은 돌아가신 후여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김형태 원로목사님께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잘하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시인의 인생 소풍길엔 즐거움도 많았고 고통도 많았다.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난 시인은 광복과 함께 귀국해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 국어교사였던 김춘수 시인의 눈에 띄어 가르침을 받으며 꽃 피었다. 50년 중학교 5학년 때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운 좋게도 반에 있는 친구가 김춘수 선생님의 조카다. 학교 5학년 때 알게 된 그 친구를 통해 처음으로 나는 김춘수 선생이 시집 ‘구름과 장미’의 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그 시집을 빌려서 읽었다. 그때 나는 많은 감동을 받아 나도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외할머니 손잡고 걷던 바닷가’ 중에서)

천 시인은 서울대 상과대 수료 후 시작과 평론 활동을 했다. 64년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일하다 67년 윤이상 등과 함께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옥고를 치렀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져 갔던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는 자신이 몸과 마음을 다친 새장에 갇힌 한 마리의 새라고 생각했다.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를 소박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귀천’을 쓴 시기도 이 무렵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입가에 흐믓스레 진 엷은 웃음은/ 삶과 죽음 가에 살짝 걸린/ 실오라기 외나무다리/ 새는 그 다리 위를 날아간다/ 우정과 결심, 그리고 용기/ 그런 양 나래 저으며…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언덕에서 언덕으로 가기에는/ 수많은 바다를 건너야 한다지만/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미소-새’ 중에서)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천 시인은 72년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목옥순 여사와 결혼 후 서울 상계동 수락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시인의 생애에서 커다란 전기를 이룬 것은 수락산 밑에 정착한 일이다. 변두리의 삶이었지만 마음에 긍정적으로 투사됐다. 목 여사는 시인의 친구 목순복 시인 여동생이다. 목 여사는 85년부터 인사동에 귀천 카페를 운영하며 천 시인의 곁을 지켰다. 2010년 목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귀천 카페는 조카가 운영하고 있다.

“하늘은 천국의 메시지/ 구름은 번역사/ 내일은 비다/ 수락산은, 불쾌하게 돌아앉았다/ 등산객은 일요일의 군중/ 수목은 지상의 평화/ 초가는 농장의 상징/ 서울 중심가는 약 한 시간/ 여기는 그저 태평천하다/ 나는 낮잠 자기에 일심이다/ 꿈에서 메시지를 번역하고/ 용이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수락산하변’ 전문)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 ‘천상병 테마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는 순진무구한 웃음을 짓는 천상병의 팔에 아이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고, ‘귀천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도 설치돼 있다. ‘천상병 산책로’에 들어서면 입구에 ‘아름다운 소풍 천상병산길’이라는 목판이 보인다. 계곡을 따라 천 시인의 시를 새긴 시판이 쭉 늘어서 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시를 감상하다 보면 잊었던 순수한 감성이 되살아난다.

그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여겼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수필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소로운 일에서 인생의 근본을 생각게 하는 것이 시다. 믿음과 생활은 시의 근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려운 말이 개입할 여지가 나에게 없는 것이다.”(‘나의 시작의 의미’ 중에서)

시인과 안면도

그가 살았던 상계동 주택은 헐리고 현재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2004년 평소 천 시인과 가깝게 지내던 모종인씨가 수락산 자락에 있던 시인의 옛집이 재개발로 철거된다는 소식을 목 여사로부터 듣고 사비를 들여 충남 안면도 부속 섬 대야도에 고택을 복원했다.

안면도 안면읍을 거쳐 영목 쪽으로 가다 보면 세거리가 나오고 ‘천상병 시인 고택’ 표지가 있다. 천수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옛집 하나가 보인다. 열 평 남짓하다. 시멘트 벽돌을 쌓고 그 위에 슬레이트를 올려 방 셋을 만들었다. 중간 방엔 문학지와 원고지가 올려져 있는 앉은뱅이 밥상이 있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살았던 천 시인이 느껴졌다. 고택의 열려진 방문 안으로 그가 예수라 했던 빛이 바다의 바람과 함께 들어왔다.

“대낮의 빛은 태양입니다/ 밤의 빛은 전기요 등불입니다/ 내가 사는 빛은 예수님이고/ 내가 죽은 빛도 예수님이다…나의 삶이여/ 빛을 외면하지 말게 하소서”(‘빛’ 중에서) “예수님 예수님/ 제발 돌아와 주소서/ 그렇잖으면 저는/ 한 알의 흙과 같습니다.”(‘예수님 초상’ 중에서)

■ 천상병처럼 살기
예수님이 걱정 말라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나의 가난은’ 중에서)

천상병(사진) 시인은 가난해도 행복했다. 그의 일생은 가난과 고통으로 물들었으나 그의 시어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가난은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는 의식의 깊은 곳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학교를 그만뒀다. 말리는 친지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자 평론가가 됐으니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월급쟁이가 된다면 돈을 벌게 될 것이고, 돈을 벌면 진정한 시인으로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도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란 말씀의 참뜻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나는 행복합니다’ 중에서)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 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나의 가난함’ 중에서)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으로 불렸던 천 시인은 우주의 근원, 삶과 죽음,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많은 이들이 천 시인은 누구보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기억한다.

안면도=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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