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아비 없는 세상에서


 
1954년 대구 성광교회와 성광유치원 마당에서 교사와 아이들이 놀고 있다. 매일신문
 
1954년 대구 피난민촌에서 어린이들이 우유 배식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매일신문/ 1954년 미국 가수 마릴린 먼로가 대구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오른쪽). 필자 제공
 
1950년 대구 계산성당 일대. ‘마당깊은 집’은 6·25 전쟁 후 대구로 피난 온 이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린다. 필자 제공
 
김원일


어린 시절 전쟁을 겪은 작가들에게 6·25 전쟁은 작품의 중요한 소재이자 동기였다. 예컨대 이청준 이문구 김원일 윤흥길 이동하 박완서 오정희 등의 소설에서 유년기의 전쟁 체험은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이들 작가에게 전쟁은 역사적 트라우마인 동시에 개인사적으로도 문제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의 소설에서 전쟁은 대개 이념이나 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문제 혹은 생존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그려졌다. 김원일의 장편소설 ‘마당깊은 집’(1988)이 대표적이다.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은 현재 40대 전업작가인 ‘나’가 열세 살 소년이었던 ‘나’의 과거를 회고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피난지 대구에서 작가가 실제 겪은 가난했던 한 시절이 담담한 회고조로 서술된다. ‘마당깊은 집’은 88년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대중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다. 90년 초에는 TV 드라마로 각색돼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92년에는 예능 프로그램인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에 소개되면서 다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 소설의 배경이 된 대구에는 ‘마당깊은 집’ 투어 코스가 만들어져 관광객들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어린 소년이 경험한 전후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그린 이 소설에 대한 대중적 호응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 소설이 전쟁과 산업화로 대표되는 고난과 풍파를 견디며 살아왔던 한국사회 대중들의 집단의식의 민감한 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김원일은 전후 피난지 대구의 궁핍하고 고단했던 일상의 풍경을 정교하게 재구성한다. ‘나’(길남)는 월북한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기대와 닦달을 한몸에 받으며 어린 나이에 소년가장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어린 ‘나’에게 54년의 대구는 온갖 생존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극한의 공간이었다. 함께 세 들어 살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다. 이들은 전쟁통에 원래 살던 곳에서 밀려나 낯선 피난지에서 살아가야 했던 이방인들이다. 경기도 연백에서 피난 온 경기댁네, 강원도 평강 출신 퇴역 상이군인 가족인 준호네, 평양에서 피난 온 평양댁네, 그리고 바깥채의 김천댁 모자. 이들은 모두 한반도 각지에서 대구로 흘러들어온 유민이자 난민이었다. 이들 집안은 모두 “∼댁”으로 불렸다. 그것은 가부장 없는 가정의 명칭이다. 대구는 남편 없는 여자들이 아버지 없는 자식들을 데리고 모여든 난민들의 임시거주지였던 셈이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그 시절 ‘마당깊은 집’ 사람들을 포함한 피난민들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서술하는 데 할애된다. ‘나’와 동생들이 점심밥을 굶는 건 예사였고 제대로 먹지 못해 걸핏하면 다리를 휘청하며 넘어졌다. 아이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배불리 먹을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다. ‘나’가 신문을 배달하던 고아원 아이들은 또 어떤가. “올챙이 배, 꼬치꼬치 마른 다리, 부스럼 머리통, 마른버짐 얼굴, 부스스한 머리카락”의 거지꼴을 한 아이들은 그 자체로 전쟁 직후의 가난이 얼마나 끔찍하고 절박한 문제였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동생인 길수의 죽음. 그는 “들퍽지게 쌀밥 한 그릇 먹어보지 못한 채” 여덟 살에 뼈가죽만 남기고 죽었다. ‘나’는 동생의 죽음이 “태어난 뒤 전쟁을 만나 젖은 물론 건더기 있는 음식을 두 해 넘이 제대로 먹지 못함으로써 뇌와 오장육부가 제 터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어린 시절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궁핍했던 경험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강렬한 파토스다. “배를 가장 많이 곯았던 시절”의 경험은 이제 “세 끼니 먹는 걱정을 하지 않게 된 지금”의 ‘나’에게 “배를 가득 채워야 숟가락을 놓는 식사 습관”을 남겼다. 어머니는 그 시절 먹는 데 포한이 들어 그후 “육류를 즐기는 과식”의 습관을 갖게 됐다. 그 때문에 어머니가 이른 나이에 고혈압으로 숨졌음에도, ‘나’는 여전히 과식의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는 자신에게 들러붙은 가난의 기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그것은 지금 ‘나’의 신체와 습관까지도 지배한다.

‘마당깊은 집’이 출간된 88년은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로 “단군 이래 최고”라고 할 정도로 경제는 호황기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라는 예능 프로에 소개되며 이 소설이 다시 한번 베스트셀러가 됐던 92년도 마찬가지다. 그 시기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 시대를 앞두고 있었고 소비주의 라이프스타일의 확산으로 절약보다 소비가 새로운 미덕으로 권장되던 시대였다. 가난했던 옛 시절을 회고하는 이 소설은 모든 것이 넘쳐나는 호황기의 안정된 삶의 분위기 속에서 소비됐다. 지금은 전업작가가 된 ‘나’의 시선도 그에 몫을 보탠다. ‘나’는 이제 쌀밥과 고기반찬, 아파트, 캐시미어 이불 등으로 상징되는 풍요로운 삶을 어느 정도는 누릴 수 있게 됐다. ‘나’뿐만이 아니다. 오랜만에 대구를 찾은 ‘나’는 한때 ‘마당깊은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각자 조그만 성공을 거두면서 잘 살고 있는 현재를 후일담처럼 들려준다. ‘마당깊은 집’ 사람들은 이제 배고팠던 시절을 되돌아볼 만큼의 여유는 갖게 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현재의 상황과 관련해서만 일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혹은 현재의 관점에 따라 과거는 다르게 기억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먹고 살 만하게 된 현재의 시점에서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을 돌아본다. 과거의 가난은 추억이 되고 상대적으로 먹고 살 만하게 된 현재는 긍정된다. 가난했던 과거는 그렇게 현재를 재는 삶의 기준 혹은 척도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전쟁 체험 세대에게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잘 살아보세”라는 가난 극복의 구호야말로 모든 목표에 앞서는 지상 최대의 가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그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만큼이나 강력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기본 논리였다. “열심히 노력했던 사람이 모두 잘 살게 되었다”라는 식의 이 소설의 회고적 서술은 한편으로 경제 발전과 성장의 논리를 무조건 긍정하고 지향했던 많은 대중들의 보수주의적 심성을 반사하는 거울로 작용했다. ‘마당깊은 집’은 바로 그런 정신의 발생과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가 그런 삶의 지향과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에 대한 긍정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 시절의 풍경과 그로 인해 형성된 지금의 내면을 우울하게 응시할 뿐이다. 주목할 점은 전쟁 같은 세월을 헤쳐 온 ‘나’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재의 삶에 그렇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건 어려서는 “애비 없는 가난한 집안의 장자”로서, 결혼한 뒤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삶을 꾸려가면서 느꼈던 원초적인 고달픔이다. 어린 ‘나’에게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머니의 냉대와 가혹한 매질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바람둥이 빨갱이 남편에 대한 분노, 밤낮 없이 일해도 네 아이 입에 풀칠도 어려운 살림살이의 고통, 어떻게든 아이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힘들게 살아도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그 결과 몸에 밴 지나친 결벽증 등등. 여기서 온 어머니의 광포한 신경질은 가장 만만하면서도 기대게 되는 장자인 ‘나’를 희생양으로 해서 터져 나왔다. 고작 열세 살에 세상의 냉대와 어머니의 학대, 그리고 생존에 대한 압박, 장자의 책임감에 짓눌린 ‘나’는 그저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가난을, 학대를, 그리고 슬픔을.

어린 ‘나’는 신문배달을 하다가 알게 된 대본집 아저씨에게 ‘소공자’를 빌려 읽는다. ‘소공자’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뉴욕에서 살던 세드릭이라는 소년이 자신이 영국 백작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백작의 후계자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나’가 이 이야기에 매혹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무의식적 분출이었다. 그러나 ‘나’는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유럽 교양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체제에서 일탈하는 성장소설의 주인공도 아니다. 삼시세끼 배불리 먹는 것이 거의 유일한 소망이자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과 손길이 그립기만 한 소년에게 어쩌면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일탈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저항과 도피와 일탈은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시급함 앞에서는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건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 ‘나’는 그저 빨리 늙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저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벌레”가 되고 싶을 뿐이다.

입대 영장을 손에 쥐자, 입대 제대 직장구하기 결혼, 그래서 처자식 먹여 살리기의 뻔한 내 앞날이 떠올랐다. 나는 그만 암담해져 빨리 늙은이가 되어 나에게 기대를 거는 모든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무관심의 대상으로 남고 싶었다. 먹고 잠잘 곳만 있다면 공원이나 길거리에 하릴없이 소일하는 늙은이야말로 진정 부러움의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절박한 생존의 요구 속에서 자기를 소모시켜온 세대의 우울한 자학적 내면이다. 빨리 늙어버리고 차라리 ‘벌레’가 되어서라도 자기를 짓눌러온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 자기소멸의 충동. 한 번도 ‘깽판’ 친 적이 없는 “내성적인 자기 학대형”의, 이 짓눌린 세대의 깊은 우울과 슬픔이야말로 ‘마당깊은 집’을 감싸는 가장 무겁고도 가슴 아픈 아우라다.

■ 김원일은
전쟁·분단의 비극 해부 집중… 환경에도 관심

김원일(75·사진)은 1950년 6·25 전쟁 중 아버지가 월북한 뒤 4남매의 장남으로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66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1961·알제리아’가, 67년 ‘현대문학’에 장편소설 ‘어둠의 축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실존적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단편소설을 주로 썼지만, 곧 작가가 어린 시절 겪은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해부하는데 집중한다.

그의 대표작은 대체로 분단 소설로 분류된다. ‘어둠의 혼’(73) ‘노을’(77) ‘연’(79) ‘미망’(82) ‘불의 제전’(83) ‘겨울 골짜기’(86)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한국전쟁 전사에 해당되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늘 푸른 소나무’(93) 또한 분단 소설의 연속선상에서 다뤄진다. 그의 분단 소설은 단순히 전쟁의 비극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의 비극이었던 전쟁이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떠한 후유증을 남기며 반복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소설들은 전쟁과 분단의 문제를 현재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로 사유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적 관심은 전쟁과 분단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일찍이 생태환경 문제에 천착한 ‘도요새에 관한 명상’(79),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인 ‘오늘 부는 바람’(76), ‘마음의 감옥’(90),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불행한 세대의 노년을 다룬 ‘슬픈 시간의 기억’(2001) 등이 있다.

가장 최근에는 그동안 작품 속에서 부재하거나 비중이 작았던 아버지를 서사의 전면에 내세운 장편소설 ‘아들의 아버지’(2013)를 출간했다. 그는 현대문학상(74) 대한민국문학상 대통령상(78) 동인문학상(84) 이상문학상(90) 황순원문학상(2002) 만해문학상(2005) 등을 비롯한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진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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