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경제인사이드] ‘입’에 따라 춤추는 ‘돈’




공약은 곧 돈이다. 공약은 당선의 밑바탕이 되지만 당선 이후에는 빚으로 남는다. 특히 복지나 사회간접자본(SOC)과 관련된 공약은 대부분 소요재원이 최소 수천억원 대다. 예산당국 관계자는 3일 “지난 정부가 대선 공약을 제대로 지켰으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이미 세자릿수(지난해 말 현재 38.3%)를 돌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공약은 당선 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전략적 모호성을 띤다. 대선 후보들이 외치는 공약이 한 목소리처럼 들리지만 각 후보의 공약집 상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다. 유권자들은 구체적이지 않은 대선 후보들의 말만 믿다가는 다음 정부에 지독한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모두 19대 대선공약으로 어린이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더 이상 사회적 모금에 기대게 하지 말고 정부가 부담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뜻있는 사회복지단체들이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를 만들어 이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린이병원비연대는 연간 건강보험 누적 흑자 17조원의 3% 정도인 5152억원만 투입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 실제 지난해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이 내용을 담은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 예산정책처가 뽑은 소요비용추계도 연간 5716억원으로 비슷했다.

세 후보 모두 말로는 같은 공약을 외쳤지만 공약집을 자세히 보면 심 후보와 문·안 후보의 말은 천지차이다. 어린이병원비연대가 추산한 연간 소요재원 5152억원 중 3분의 2가 넘는 3846억원(74.7%)은 건강보험공단이 책임지지 않는 비급여 항목에 해당한다. 하지만 문 후보의 공약집에는 ‘어린이 입원진료비 본인부담 비율 5% 인하’로 명시돼있고 안 후보 측도 ‘18세 미만 입원진료비 본인부담률 20%→5%로 조정’이라고 돼 있다. 두 후보 모두 비급여항목 3846억원을 뺀 나머지인 급여항목 1306억원만을 포함시킨다는 의미다. 이것도 전액 보장이 아니라 현행 20%인 본인부담비율을 5%로 낮추겠다는 것이다. 결국 문·안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급여항목 1306억원 중 4분의 3인 980억원만 새롭게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후보의 입에서는 같은 말이 나왔지만 아픈 아이들이 받는 복지 혜택은 ‘5152억원 VS 980억원’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기초연금 공약도 비슷하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매달 기초연금을 2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축소·변형된 지 오래다. 2014년부터 기초연금제도가 도입됐지만 전체가 아닌 하위 70%로 한정됐다. 공약은 축소됐지만 상위 30% ‘부자 노인’에게까지 줄 필요는 없다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문제는 기초수급생활대상자인 하위 10%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줬다 뺐는 데 있다. 현재 기초수급대상 노인들은 매달 25일 기초연금으로 20만원을 받지만 다음달 20일 생계급여는 그만큼 제하고 받는다. 기초연금 도입으로 절반이 넘는 60%의 노인들이 월 소득이 20만원 늘지만 정작 가장 어려운 하위 10% 노인들은 소득증가 효과가 없는 셈이다. 정부는 기초연금은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이전소득에 해당하지 때문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상 이중 지원 불가 원칙에 따라 줬다 뺐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노인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대선에서 주요 5명의 후보들은 모두 기초연금을 30만원으로 인상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투표율이 높은 노인 표심을 사기위한 필수적인 공약인 셈이다. 그러나 심 후보를 제외하고 문·안 후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등 4명은 어느 누구도 ‘줬다 뺐는 기초연금’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이들 네 후보는 기초연금 30만원 인상에 들어가는 연간 소요재원을 최소 3조6000억원(안 후보)에서 최대 5조5000억원(홍 후보)으로 잡았다. 하지만 줬다 뺐는 기초연금 문제를 개선할 경우 소요재원은 각각 9600억원씩 늘어나야 한다. 기초수급생활대상 노인 40만명이 매달 20만원씩 받았다 국가에 다시 빼앗기는 전체 금액이 연간 9600억원 가량이기 때문이다. 빈곤노인기초연금보장연대 소속 이명묵 사회복지사는 “문·안 두 유력후보가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노인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줬다 뺐는 기초연금 문제에 침묵하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공약의 ‘숫자놀음’은 지난 정부에서도 있었다. 박근혜정부는 집권 첫해인 2013년 지역공약 가계부를 발표했다. 공항·고속도로 건설 등 167개 지방 공약 사업에 필요한 예산 124조원을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124조원이 소요되는 지역공약 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올해까지 20조원이 넘지 않을 전망이다. 총 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인 사업을 대상으로 경제성이 있는지 판단하는 예비타당성조사는 45개 대상 사업 중 절반가량만 완료됐다. 지역공약 가계부가 발표됐을 당시 예산당국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역공약은 이번 정부에서 시작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공약 어디에도 이번 정부 임기 내에 어느 정도까지 진척해야 한다는 문구는 없다. 지켜봐라. 이번 정부에 들어가는 돈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5명의 주요 후보들은 지역공약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지난달 24일 공개한 이들 후보의 공약 답변서를 보면, 후보들은 지역공약의 개수조차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문·안 두 후보는 지역공약과 소요예산에 대해 별도로 발표하겠다고 답했다. 개수를 제시한 나머지 후보들을 포함해 5명 모두 지역공약 소요예산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후보는 지방 유세에서는 대거 선심성 대형 지역공약을 내놓고 있다. 공약집 등 구체적인 근거를 남기지 않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쯤 대선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변질되지 않고 제대로 지켜지는 날이 올까. 그날은 유권자들이 후보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말고, 정말 지킬 수 있는 공약과 거짓말 공약을 제대로 감별 수 있을 때일 것이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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