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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나라를 망친 유능한 그들



간신(奸臣)과 간신(諫臣). 奸臣은 간사한 신하이고, 諫臣은 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하는 신하이다. 한글 표기는 똑같지만 두 단어의 뜻은 천양지차다. 이 책의 큰제목은 간신(諫臣)이 아니고 간신(奸臣)이다. ‘그들은 어떻게 나라를 망쳤는가’란 부제를 보면 이 책의 지향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간신하면 내시처럼 헤픈 웃음으로 아첨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런 선입견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간신은 아주 똑똑하고 치밀하고 집요하다. 그는 사리사욕을 추구하되 절대 사리사욕처럼 비치도록 행동하지 않는다. 아첨·모함·협박·파당·축재 등 온갖 능력도 갖추고 있다.

간신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무리를 지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간신들은 시나브로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린다. 간신 한 명을 처벌한다고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그들은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다. 저자들은 옛 중국과 고려, 조선의 간신 25명을 집중 조명했다. 이들과 결탁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간신 규모는 훨씬 늘어난다.

고려 공민왕 때 신돈(辛旽)은 왕의 정신을 뒤흔든 도사였다. 천민 출신으로 고려 말 승려였던 신돈과 공민왕 사이에는 희한한 일화가 있다. 공민왕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승려가 구해주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신하가 소개한 신돈이 꿈속의 승려와 무척 닮았다고 한다. 공민왕은 도를 깨우친 사람으로 보고 신돈을 중용했다.

충직한 신하 이승경과 정세운이 신돈을 요승(妖僧)이라고 간언했지만 공민왕은 충언을 듣지 않았다. 신돈은 한때 공민왕의 개혁 작업을 도운 적도 있지만 뇌물수수, 탐욕, 불륜 등을 자행했다. 능력보다는 자신의 측근들 위주로 천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순실의 추천을 받아 차은택 김종덕 송성각 김상률을 문화 분야 요직에 앉힌 것과 판박이다. 신돈의 비행이 그칠 줄 모르자 사헌부가 공민왕에게 신돈의 처형을 거세게 요구했다. 신돈은 귀향을 갔다가 이틀 만에 죽임을 당한다. 최순실 일당의 구속수감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로 잘 알려진 중국 진(秦)나라의 환관 조고(趙高)도 대표적인 간신이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승상 이사와 짜고 진시황의 가짜 조서를 만들어 진시황의 큰아들 부소(扶疏)를 죽이고, 우둔한 호해(胡亥)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호해는 대궐 출입을 통제하는 낭중령 자리에 조고를 앉혔다. 박근혜 정권에서 문고리 3인방이 권력을 농단한 것처럼 조고도 국정농단의 선봉에 섰다. 조고를 포함한 간신배의 농간으로 황제에 오른 호해의 무능이 진나라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저자들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 이이첨(李爾瞻)을 실록까지 손댄 역사의 간신으로 평가한다. 이이첨은 선조의 후사 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 옹립을 주장하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조정에 복귀한 이이첨은 소북파를 숙청하고 폐모론을 주장해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그는 ‘선조실록’ 편찬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면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충신들을 깎아내리는 역사 왜곡에 일조했다. 인조반정 뒤 지방으로 도망치다가 붙잡혀 참형을 당했다.

얼마 전 우리나라는 혼군(昏君·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폐위시켰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박영수 특별검사팀과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에 따른 법적 조치였다. 하지만 이들 기관의 법적 단죄도 국민의 분노와 저항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권자들은 19대 대선에서 간신을 용납하지 않을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대통령이 정도를 걷고 유능하면 간신이 설 땅을 잃는다. 설혹 간신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대통령이 어리석고 무능하면 온통 간신배들의 세상이 되고 만다.

글=염성덕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sdyum@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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